줄리우스 시저는 기원 전 44년 로마 원로원 의사당에서 브루투스를 포함한 60명의 원로 칼에 살해당했다. 이들은 그를 죽임으로써 독재를 막고 공화국을 지킬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무엇보다 100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다 줄 사람을 원했고 그 사람이 바로 시저라 믿고 있었다. 시저의 암살자들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오히려 로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들이 간과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시저가 죽기 전 친자식을 제쳐 두고 조카딸의 아들인 옥타비안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 준 것이다. 18살짜리 소년이 시저의 후계자가 된 사실이 알려지자 시저의 정적들은 물론 그의 부관이었던 안토니까지 웃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병력을 모아 시저의 암살자들을 모두 응징하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란 이름으로 사실상 첫 로마 황제에 등극한다. 장장 40년에 걸친 그의 치세 동안 로마는 전쟁 없는 번영을 누리는데 이 시대를 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 부른다. 옥타비안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야말로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던 시저의 최대 업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 사후 네로와 칼리굴라 같은 못난 황제를 맞았던 로마는 기원 96년 네르바를 필두로 5명의 현명한 황제가 다스리는 소위 ‘5현제 시대’를 맞게 된다. 100년에 걸친 ‘5현제 시대’ 동안 로마의 국력은 절정에 달하며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이 시대는 그 후 모든 유럽인들이 다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상이 된다.
성격과 업적이 다른 이 다섯 황제는 한 사람을 빼고는 공통점이 있다. 친자식이 아니라 가장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삼아 황위를 물려줬다는 점이다. 5현제의 마지막 인물이자 철학자로 이름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못난 친자식 코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줬는데 그는 그 자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개판을 치다 본인은 암살당하고 로마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난세를 종식시키고 새 시대를 열어 가려던 인물로 로마에 시저가 있었다면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있었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여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식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개국에 공이 큰 이방원을 제쳐놓고 자신이 사랑하지만 어리고 무능한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방원은 들고 일어나 이복동생 방석과 그 형,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을 잡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이성계가 자식들의 됨됨이를 제대로 살피고 현명한 판단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다.
권력과 재물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는 자식에게 넘기는 것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재벌들은 온갖 편법을 써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기에 급급하고 그런 자식들은 호의호식하기에는 바쁘며 기부에는 인색하다.
한국 최고의 엘리트를 배출한다는 서울대 법과대학원의 경우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학생의 30%가 학비를 낼 돈이 없는 저소득층 자녀다. 이 중 상당수가 식당 종업원과 편의점 직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고 있다. 이들이 훗날 판검사가 됐을 때 자신이 잘 나서 잘 사는 줄 착각하고 비리를 저지르다 재판정에 선 재벌 2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요즘 한국에서 기소된 재벌들이 어째서 거의 예외 없이 법정구속 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재벌들은 물론이고 판검사를 하다 변호사 개업 후 전관예우로 수십억씩 번 사람도 많건만 이들 중 모교에 큰돈을 낸 사람은 드물다. 한국 재벌 중 드물게 오랜 세월 가난한 서울 법대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온 한화 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구속된 재벌 회장 중 드물게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이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반드시 그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가진 자는 베풀고 없는 자는 감사히 받는 곳이 천국이라면 가진 자는 안 내놓고 없는 자는 죽기 살기로 빼앗으려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결국 천국도 지옥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이 천국에 조금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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