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의 금년회기 마지막 판결이 중간선거를 앞둔 미 정계에 양극화된 문화전쟁을 다시 불붙이고 있다.
대법원은 30일 독실한 기독교 신자 가족이 경영하는 두 회사가 오바마케어의 피임커버 의무화 조항이 소유주의 신념에 반하는 정책을 강요하고 있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영리기업이 기업주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종업원의 건강보험 적용대상에서 피임을 제외시킬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대법관들의 이념성향에 따라 보수와 진보, 5대4로 갈린 결정이었다.
이번 판결의 근거는 헌법이 아니라 1993년 입법화된 ‘종교자유회복법’이었다. 이법에 의거한 구체적 쟁점을 애틀랜틱지는 세 가지로 정리한다 : 피임커버 의무화조항이 기업의 종교자유권 행사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가, 정부는 종업원의 피임을 커버해줄 수 있는 다른 대안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기업’도 종교자유 권리를 갖는가.
보수파 대법관들은 세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판시함으로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미 시작된 뜨거운 찬반논쟁과 함께 끝없는 소송사태를 부를 것이다.
대법관들의 시각도 완전히 달랐다. 보수파의 다수의견문을 쓴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종교자유’의 시각에서 “피임비용 지불이 어떤 사람의 종교적 신념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고 반대하는 진보파의 소수의견문을 작성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은 ‘여성권리 침해’의 시각으로 분석하며 “종교자유 주장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종교자유, 피임과 낙태, 여성의 권리 등 민감한 양극화 이슈가 얽힌 케이스에서 나온 보수색채 선명한 판결이어서 각계의 반응은 격하고 소란스럽다. 그러나 정작 소송대상인 오바마케어가 받을 타격은 별로 크지 않을 것이다.
우선 피임커버 의무화조항은 오바마케어의 핵심 내용도 아니고 또 대법원이 이 조항을 무효화시킨 것도 아니다. 판결은 ‘소수주주가 지배하는(closely held)’ 기업에 한해 종교적 신념에 반대될 경우 그 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한 것이다. 고용주가 지불 안하는 피임커버는 정부나 보험사가 지원하도록 대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은 다르다. 대법원이 금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최대 공격목표인 오바마케어에 정면으로 한차례 타격을 가해준 셈이다. 오바마케어가 900만명 가입을 기록하며 초기의 재난을 딛고 이제는 안착한 시점이어서 공화당에겐 타이밍도 적절하다. “큰 정부를 꾀하며 헌법의 경계를 넘고 있는 행정부의 또 하나 패배이자 종교자유의 승리”라고 공화당 리더들은 환영 일색이다.
정치적 기회는 민주당에게도 왔다. 대법원이 허용한 기업의 종교자유의 대가가 여성 종업원들의 피임선택 권리였다. 기본권을 침해당한 ‘여성의 분노’가 투표율 낮은 젊은 독신여성들을 표밭으로 불러내는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백악관은 즉각 “여성들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고 민주당 의원들은 “대법원이 여성 건강의 기본권리를 보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우리가 하겠다”고 다짐하고 나섰다. 여론의 53%도 고용주가 종업원의 피임문제에 관련해선 안 된다고 응답했고 여성단체들은 “보스의 업무는 회의실에서 끝내라, 내 침실까지 오지 말라”라는 피켓을 들고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번 판결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한 가지는 종업원 건강보험에 대한 보수 대법관들의 시각이다. 프린스턴대 우웨 라인하트 교수가 지적했듯이 건강보험은 “종업원 노동의 대가인 전체보수의 한 부분”이다. 기업주가 개인 돈으로 지불하는 선심이 아니다. 그 같은 건강보험 시행이 왜 기업주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일치해야 하는가.
얼리토는 이번 판결의 적용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라고 강조했지만 긴스버그의 경고처럼 “깜짝 놀랄 만큼 포괄적”으로 확대될 소지도 다분하다. 기업주 각자의 종교에 따라 수혈, 백신, 불임수술, 항우울제, 암치료 등에 대한 보험커버를 거부한다면 어떤 논리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계류 중인 50건 유사케이스에도 이번과 같은 판결이 나올지, 여성의 분노가 11월 표밭으로 옮겨 붙을지…실제 파장은 좀 더 지켜보아야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현 보수 대법원의 ‘기업사랑’이다. 2010년 ‘시민연합’ 판결로 기업에도 사람처럼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서 무제한 선거기부를 허용해 사상초유의 돈 선거 사태를 초래하더니 이번엔 종교자유를 누릴 권리까지 부여했다.
앞으로 ‘기업’이 또 어떤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며 종업원 혜택을 거부하는데 더 용감해질지 우려된다면 라인하트 교수의 제안대로 기도하자 - “언젠가는 기업보다는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대법원을 가질 수 있기를!”
대법관 인준권을 가진 상원의원 선출을 포함한 중간선거가 넉 달 남짓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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