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순리대로라면 이번호의 글 전에 두어 편의 글들이 나갔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7월4일)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것이 생각나면서 ‘미국독립선언문’을 오늘의 글로 내보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독자들께서 읽어보신 후 다소 순서가 바뀐 느낌이 드시더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미국은 1776년 7월2일에 ‘미국은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한다’ 라고 제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가 공포했다. 그러나 대륙회의는 이미 3주전에 독립선언문 작성위원회를 구성하고 약관 33세의 버지니아 대의원 토마스 제퍼슨을 위원장으로, 후일 제2대 미국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와 벤자민 프랭클린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2주 만에 작성되고 7월 4일에 대륙회의가 가결한 독립선언문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We hold these truths self- 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i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pursuit of Happiness. That to secure these rights,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that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 laying its foundation on such principles and organizing its powers in such form, as to them shall seem most likely to effect their Safety and Happiness.
제퍼슨은 이 독립선언문을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아주 쉬운 단어들과 평이한 문구로 작성하였고 어떤 신학이나 정치사상을 인용하지 않고 ‘self-evident’ 라는 ‘자명한 논리’를 썼는데 당시의 영국왕 George 3세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과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난하는 문구 등이 심의 과정에서 삭제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초안을 수정함이 없이 1776년 7월 4일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Independence Hal에서 Second Continental Congress 가결하였다고 한다.
이 독립선언문은 제퍼슨이 가지고 있던 평소의 정치철학에 기초를 둔 것이었겠지만 어떤 역사학자들은 John Locke 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Glorious Revolution 때인 1688년에 쓰인 인권선언서에 ‘Life, Liberty and Property’ 라는 표현이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Life, Liberty and pursuit of Happiness’ 라는 조금 변형된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선언문의 영향을 다소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눈에 띠는 단어는 ‘the Creator’ 라는 것인데 당시 기독교가 우세종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he God’ 대신에 ‘the Creator’를 씀으로써 범종교적인 포용성을 독립선언문에 명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제퍼슨은 이 독립선언문에서 미국에 대한 영국의 압정과 실책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미국 사람들이 겪어온 고초를 설명하면서 계속해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영국에 호소해 왔으나 영국은 탄압과 착취의 강도만 높여왔음을 지적하고 미국은 독립을 쟁취할 수밖에 없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 미국 독립선언문은 그 후로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세계도처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격려하는 명문이 되었다. 1789년의 불란서혁명에 영향을 주었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던 남미제국이 1820년대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투쟁이 시작되도록 하였으며 미국의 남북전쟁도 말하자면 ‘Men’과 ‘Equality’를 다르게 해석하는데다가 노예문제에서 오는 이해관계가 상반되었던 남북 간의 갈등이 드디어 남북전쟁으로 까지 가게 되었었으며 심지어는 IRA(Irish Revolutionary Army)까지 영국에 저항하면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했다고도 한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작성했다는 대한 독립선언문을 읽어 보면서 필자는 육당선생도 분명히 미국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인도의 간디가 우리의 3.1 운동에서 무저항주의 독립운동 방법을 배웠다고만 말했다 지만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세계의 모든 억압받는 나라들과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과 격려를 주었을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가장 자주 또한 널리 인용되는 문구가 ‘All Menare created equal’ 이라는 것인데 이 표현은 인용자의 편의에 따라 자주 오해되고 곡해되고 남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된다. 제퍼슨 자신은 ‘Men’ 에 어느 수준이상의 재산이 있는 백인 성인 남성을 의미 했었고 ‘Equal’이라는 단어는 ‘본토에 있는 영국인과 식민지에 있는 영국인’을 차별하지 말라는 의미로 ‘equa’l 이라는 단어를 썼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역사에서만 보더라도 투표권에 적용된‘ the men’이라는 의미는 시초에는 ‘어느 수준의 재산을 소유한 백인성인남성’ 이었다가 ‘모든 백인성인남성’으로 변했고 그 후에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으로, 또 다시 18세 이상의 모든 남성” 이 되었다. 1920년에 헌법개정 19조가 통과됨으로써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줌으로써 18세 이상의 모든 미국국민들이 ‘the men’에 포함되었다.
여성차별철폐를 주장했던 1848년의 여성인권보호대회에서는 여성평등을 분명히 밝히는 ‘여성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하였고 1970년대의 여성의 동등한 권리보장을 주장하던 여성운동가들도 Equality를 항상 내세웠다. 마틴 루터 킹 Jr.목사의 ‘I have a dream’의 연설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이 Equality 라는 사상은 험한 풍랑 속에서 흑인들에게 희미하게나마 계속 비춰진 먼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채로 부과된 세금은 내야할 의무가 없다”는 주장의 근원이 되기도 한 이 독립선언문은 미국사람들이 국보 제1호처럼 귀중하게 모시는 보물인데 19세기 중에 보존기술이 신통치 않아서 지금 원본은 까딱하다가는 다 부셔져 내리기 쉽게 되어있다고 한다.
이 독립선언문의 서명란 맨 중앙에는 당시 제2차 대륙회의 의장이었던 매사추세츠의 John Hancock 이 아주 큰 글자로 서명하였으며 그 후 11월까지 13개주의 의원들이 계속 서명하여 총 56개의 서명이 있다.
제퍼슨은 자기 필생의 위업으로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보다는 버지니아 주의 종교자유법 제정자, 버지니아 대학교 창설자라는 것과 미국독립선언문의 저자라고 기록해달라고 해서 실제로 그분의 묘비에 그렇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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