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196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유행하던 표현 중에 ‘자의반 타의반’ 이란 구절이 있었다. 박정희 소장의 군사쿠데타 성공에 가장 공로가 컸다고 자타의 인정을 받으면서 신군부세력의 실세로써 천하를 호령하던 김종필 씨가 몇 년 후 실세에서 밀려나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소감과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던 말이었다.
미국의 독립운동과 전쟁의 시작을 써 보고자 하니 “자의반 타의반” 이란구절이 문뜩 머리에 떠오른다. 아마 미국은 영국이 어느 적정선 아래로만 착취하고 미국을 조금 더 현명하게 구슬렸으면 경제적으로는 훨씬 더 빨리 성장하였을 것이나 독립은 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페인까지 불란서 쪽에 가세된 영불전쟁에 영국이 정신을 놓았던 1700년과 1760년 사이에 미국은 인구도 많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불란서, 화란 등과 거래해서 무역량을 다섯 배로 증가시켰었다. 영국은 악명 높은 Navigation Acts 만 만들어 놓았지 해군력이 모자라 미국의 무역을 제대로 해상통제하지 못하였었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시작과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미국의 초기 13개 주가 뭉쳐서 독립을 한다는 것은 13개의 괘종시계가 동시에 종을 치게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했었다. 어업과 공업을 기반으로 했던 뉴잉글랜드 주들과 상업과 무역업을 기반으로 했던 중부 주들과 대농장 위주의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남부의 여러 주들 간에는 거의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이해관계가 상충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영국국민으로 계속 남고자 했던 사람들과 독립을 원했던 사람들로 모두 갈리어져 있어서 의견을 통합하지 못한 채 백여 년이 후딱 흘러갔었다.
그런데 ‘자의’로는 불평들만 했었지 시도해보지는 못했던 ‘독립’이란 바짝 마른 나무숲에 ‘타의’로 불씨가 튀었던 것이다. 일단 시작된 산불은 연결된 모든 산들이 다 타버릴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한편 미국의 Town들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Town meetings로 정치를 했고, 주민의 선거로 구성되는 주의회는 영국왕에 의해 임명된 주지사를 견제하는 민주적 자치정부에 점점 익숙해 가고 있었다. 보스턴 지역에서는 미국인들의 “간이 커져서” 영국국교인 Anglican Church를 금지시키기도 하고 미국 개신교인이 아니면 투표권을 주지 않기도 하였으며 퀘이커 교도 세 명을 시내에서 교수형에 처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 대한 반발이 점점 노골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무렵 영국은 영국군이 미국원주민의 공격으로부터 미국민들을 보호해 준다는 구실로 뉴욕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의 보급물자를 뉴욕이 조달할 때까지는 주지사가 뉴욕주 의회의 모든 입법을 거부하도록 하였다.
1769년에 영국상품 불매운동이 시작되자 일 년 사이에 대미 영국수출이 40%나 감소하였다. 영국왕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조사단을 파견하면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기가 일수였다. 이러한 미국의 커져가는 불만들을 무력으로 다스려 보기 위해서 1768년에 영국은 정규군 2개 연대를 보스턴 에 주둔시켰다. 보스턴 주민들은 영국군에게 욕질을 하며 모욕을 주어 시달림을 주었다. 영국왕은 군대에게 주점(tavern)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민간인의 주택을 임대료 없이 쓸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
1770년 3월에 ‘보스턴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경위는 간단했다. 영국군인 여러 명이 보스턴 시내를 겨울밤에 걸어가고 있는데 실업으로 불만에 쌓여있던 주민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눈 팔매질을 했었다. 혼돈 중에 영국 군인들이 발포하기 시작했고 흑인 한명을 필두로 주민 다섯 명이사살되었다. 군인들은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변호사 존 애덤스(후일 미국 2대 대통령)의 변호로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3년 후에 보스턴 Tea Party 사건의 주동자 역할을 했던 샘 애덤스가 이 사건에도 나섰다. 존 애덤스의 사촌이기도 한 샘 애덤스는 좋은 집안출신으로 Harvard 대학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하는 일마다 실패한 인물이었다.
자기 부친이 사업체를 차려주자 곧 말아먹었으며 보스턴 tax collector 로 있던 동안에는 받은 세금을 다 입금 하지 않아 말썽이 난 인물이기도 했다. 자기 일에는 실패만 거듭하던 이 사람은 남의 일을 조언하는 데는 명인이었다고 한다.
언론인이기도 했던 샘 애덤스의 탁월한 특기는 ‘정치선동가’이었는데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이것을 침소봉대해서 그 사건의 책임이 영국에 있다고 떠벌리는 것이었다. 보스턴 의 영국군인 총격사건도 샘 애덤스에 의해 미국 전역에 ‘보스턴 Massacre(보스턴대학살)’이라고 알려졌다. 일부 보스턴 시민들로 부터는 불신을 받기도 하였지만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샘 애덤스는 그 나름대로 많은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영불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763년의 Paris 강화조약으로 캐나다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은 북미에서 불란서를 거의 다 쫓아내었다. 패전한 불란서를 도왔던 죄로 스페인은 플로리다 를 영국에 완전 양도하였으며 쿠바와 마닐라도 영국에 양도하였으나 후일 영국은 두 지역을 스페인에게 되돌려주었다. 불란서는 이때에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 영토를 스페인에게 양도하였다.
북미주를 통치하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은 영국은 통치방법을 정리하고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은 미국원주민들과의 계속되는 전쟁이 식민지 미국인들의 끊임없는 서부개척 욕심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애팔레치아 산맥 서쪽으로는 새 개척을 금지하도록 했고 원주민들은 동쪽으로 침범하지 않도록 경고 했다.
영국은 Quebec Act 라는 법을 만들어 불란서로부터 쟁취한 캐나다의 퀘백 주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오하이오 주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동일한 지사가 통치하도록 했으며 천주교인들 에게만 특전을 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은 버지니아 주이었다. 버지나아는 수익률이 아주 좋은 담배를 생산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새 땅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또 뉴욕,커네티컷, 매사추세츠 등 여러 주들은 서부쪽 땅들에 개척권을 주장해오고 있던 터이라 Quebec Act에 강하게 반발하게 되었다. 이 Quebec act는 미국인들을 자극하는 효과만 남긴 채 1791년에 폐지되었다.
미국 초기 13개 주들은 각기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쯤인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었던 탓에 벤자민 프랭클린 등의 정치가들이 주들의 연합을 호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연합을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모든 통상을 중단하자고 제안한 매사추세츠의 제안에 따라 1774년 9월5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주의 대표 56명이 Continental Congress로 모여서 미국의 장래를 논의하게 된다.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왔으나 매사추세츠 주 대표인 샘 애덤스와 패트릭 헨리 등의 강경노선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쪽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과의 교역중지를 결의하고 각 지역에 실천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영국국회에도 미국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미국대표의 참석 없이 부과되는 세금들을 무한히 받아드리지 않을 것 등을 통지했다. 이 Continental Congress 는 그야말로 ‘대륙회의’에 지나지 않아 아무에게도 법적인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회의에 지나지 않았으나 미국의 모든 주들이 독립쪽으로 같이 첫 발걸음을 내딛도록 했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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