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금요일
다리에 쥐가 나서 깬 시각이 또 3시 30분이다. 휘황찬란했던 밤이 가고 정결한 해가 솟는 새벽, 라스베가스의 맨얼굴이 궁금해 혼자 정찰을 나갔다. 여명 속에 드러나는 아스라한 지평선가의 야자나무 숲들이, 오아시스나 유토피아인양 싱그럽고 신선하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던 환락의 도시에서, 흥청거리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길거리는 텅 빈 채 적막하다.
네온사인 화장을 지운 라스베가스의 민낯은 카지노와 유흥의 냄새를 전연 안 풍긴다. 조깅하는 사람과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청년, 여타 도시의 아침얼굴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길바닥에 웬 삐라 같은 종이쪽지들이 여기저기 나뒹군다. 주워 보니까, 상반신누드에 야한 포즈를 취한 여성사진과 전화번호가 적힌 일종의 판촉명함이다. 그제야 ‘죄악의 도시(Sin City)’라는 별명과, 도박 외에도 매춘까지 허용한 주라는 게 깨우쳐졌다.
발걸음이 저절로 뉴욕뉴욕 호텔로 가게 된다. MGM호텔 쪽과 연결된 육교로 올라가보니, 난간위에 그물망이 한길도 높게 쳐있다. 알거지 된 노름꾼들의 자살방지용인가보다. 그 밑에 허우대가 멀쩡한 백인의 중년남자가, 깡통을 앞에 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다. 흔히들 말하길, “자동차를 타고 왔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는 라스베가스지만, 이 사람은 버스비마저 홀랑 날렸나보다.
이 사람의 가족들은 폐인이 된 가장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술과 담배는 본인만 망가지지만 도박은 주변인들까지 망하게 한단다. 한 순간의 삐끗한 선택과 중독으로 막다른 골목까지 당도한 이 딱한 남자를 보니, 그 말이 100%실감이 난다. 인간이 만든 물질문명의 노예는 절대 되지 말아 얄 텐데...
무서운 도박의 폐해증거는 또 있다. 라스베가스의 하수도는 어찌나 넓고 잘 돼있는지, 패가망신한 도박꾼들의 마지막 아지트란다. 침대, TV, 소파까지 넣고 거주하는, 말하자면 ‘지하도시’인 셈인데, 인구도 무려 1500명가량이나 된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인간들에 의해 탄생된 경이의 도시가, 인간을 처참히 바닥 치게 만드는 현상을 어찌 봐야하나. 인간이 스스로 판 무덤이자 바벨탑 아닐까.
고백하자면 나 역시 실수와 시행착오로 점철된 삶이었다. 소소한 잡사는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이 미숙했던 적도 다반사였다. 그런 오판의 대가로 뼈아프게 자책도 많이 했고, 갈등과 고통도 제법 겪었다. 섣부르고 미욱한 판단으로 ‘잘못 간 길’에 서서 후회도 해보고, 설익고 경솔한 판단으로 ‘멈춘 길’에의 아쉬움도 크다. 주저되고 용기 없는 판단으로 ‘가지 않은 길’에의 미련과 갈증도 많다.
단 한 번의 삶을, 꿈이나 이상과는 달리, 잘못 살았다는 한탄이 마음을 맴돌곤 한다. 고로 이아침에 떠오르는 상념은, 저 남자나 나나 ‘회오하는 인생’이란 측면에선 별 차 없다는 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나의 삶>이란 시를 떠올리며, 작디작은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 나의 삶이 어디까지 이를지/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나는 아직도 폭풍 속을 거닐고 있는가 /물결이 되어 연못 속에 쌓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이른 봄추위에/얼어붙은 창백한 자작나무일 뿐인가?
버스는 280마일 떨어진 그랜드캐년을, 애리조나고원지대를 통과해 4-5시간을 달려서 간단다. 1540년 스페인 사람인 가르시아장군이 처음 발견했을 당시 “오우 그란떼(Big)!”해서 그랜드캐년이 된 곳.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후손들과 온 미국시민들이 이 신비를 보게 합시다.” 해서 191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 1977년 유네스코세계유산이 된 곳이다.
그 옛날 학창시절, 그랜드캐년의 존재를 처음 배운 후론, 늘 가보고 싶은 숙원의 리스트 0순위였다. 그랬는데 미국에 온지 거의 30년 만에 보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이다.
캐년으로 들어서니, 피뇬(Pinyon Pine)소나무와 마디가 불거져 나온 유타 곱향나무(Utah Juniper)들의 키가 커지면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캐년의 인기관광코스론 노스 림(Rim;계곡의 가장자리), 사우스 림, 헬리콥터에 시승하는 하늘코스라지만, 하늘코스는 제쳐놨다. 유독 고산병에 예민한 나로선 모험일 테니까. 또 사람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원만하듯, 자연도 단풍경관의 예처럼, 근경보다 원경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 고로 캐년 역시 구태여 코앞에 들이대듯 볼 필요까진 없다는 생각에서다.
우리 팀 중엔 2명만 탑승하고 8명은 I MAX영화관으로 갔다. 매표원도 검표원도 전부 인디언들이다. 기념품점의 물건들도, 대부분 행운을 준다는 새털기념품이나 인디언 문양이 새겨진 수공예물품들이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자 거주지였다는 걸, 미약하게나마 항변하고 있다는 게 전해진다.
34분짜리 기록영화의 제목은 ‘The Hidden Secret’이다. 도입부엔 태초에 그랜드캐년에 살던 인디언들의 생활상이 잠깐 비췄다. 주 내용은, 남북전쟁 상이용사였던 외팔의 존 웨슬리 파웰이, 9명의 대원과 작은 나무배에 의지해 캐년을 통과하는 콜로라도 강을 탐험하는 고난행군기다.
그 험난한 여정의 대원인 지질학자 존 스트롱 뉴베리가 “지구표면 어디에도 이처럼 구조의 비밀이 드러나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협곡은 지구의 나이테인양 여러 층의 구조란다. 장엄한 경관은 감탄스러울 만치 빼어났지만, 탐험대를 극한상황으로 몰고 가는 콜로라도 강의 황토색 급류는, 하도 광폭해 겁났다.
헬리콥터촬영이라 화면이 마구 널뛰니 정신이 하나도 없고 어지럽다. 그런데다 3D영상이라 생생한 체감을 느끼게 하는 건 좋은데, 과도한 실재감에 도저히 화면을 응시할 수가 없다. 절벽들, 협곡, 강물들이 눈앞, 코앞으로 확확 들이닥쳐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결국은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하다가, 화면의 제일 위 가장자리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덜 어지럽다는 비결을 터득했다. 헬리콥터에 앉아 대규모협곡과 기묘한 암벽사이를 바짝 파고들며 본거나 다름없다. 영화로 본 게 이정도니 진짜 탔다면 완전 넋이 나갔겠다. 고생께나 하고 있을 친구들이 은근히 염려됐다. 용감하게 탑승했던 정에게 물으니, 어지러워서 보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다 물 건너 간 채 혼났단다.
우리는 현 위치인 방문객 센터에서 가깝고, 캐년의 중심이자 가장 폭 넓게 조망한다는 사우스 림의 마더(Mather)포인트로 갔다. 사람들의 흐름에 실려 걷다가 멈춰선 순간, ‘멍!’했다. 갑자기, 정말 난데없이, 발아래 전개된, 땅이 푹 꺼진 창망한 ‘싱크 홀’ 앞에서,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위용 앞에서, 무한한 단애와 광활한 신천지 앞에서, 지구의 광대무변한 속살 앞에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온 우주가 다 내 가슴에 와 담기는 기분이다.
오랜 세월, 오매불망 그리던 곳의 실제모습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콧날까지 시큰해진다. ‘가장 아름다운 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는 거’라던 헬렌 켈러의 명언이 재차 가슴에 다가온다.
다양한 색상의 단층과 퇴적층, 계단 모양의 웅대한 기암괴석들은, 이미 브라이스와 자이언에서 충분히 감탄했기에 충격이 덜하다. 허나 여긴 20억년이란 장구한 지구역사의 무게가 차별화된 강점이고, 웅장, 광대함에선 추종불허다.
저 어마어마한 바위들이 다 18억년에서 2억7천만 년 전의 암석들이라니, 그 역사의 길이가 도통 가늠이 안 된다. 또 지층에 따라 출토되는 화석이 다 다른데, 여긴 공룡이나 매머드의 화석이 나오고, 시커먼 퇴적암은 갯벌이었대서 바다화석까지 나온단다. 인간이란 존재도 언젠가는 화석으로나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와락 엄습한다.
인디언들은 표현불능인 묘한 색깔의 바위산과 지층을 일컬어 ‘무지개가 잠들어 있는 땅’이라 불렀다니 참 근사하고 적절한 비유다. 우뚝 솟은 암석 탑들과 새카맣게 탄 것 같은 둥근 바위들은, 오래전에 근처의 화산이 폭발할 때 날라 왔던 화산탄석들이란다. 태곳적 모습 그대로인 것이 낯설다 못해 괴이쩍다. 영화 아바타
와 혹성탈출의 장면들을 연상케 된다.
외양만 독특하고 빼어난 게 아니다. 한대, 온대, 사막성의 세 가지 기후대로 수종마저 다른데다, 야생동물(먹이주면 벌금)의 보고이기도하다. 여러모로 극과 극이 공존하고, 지구행성의 신비함이 고스란히 담긴, 학술적으로도 값진 곳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이자, 영국 BBC방송에서 집계한, 죽기 전에 가 봐야할 33군데 중 하나로 꼽힌 이유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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