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 제일 큰 즐거움은 추억.경험 쌓는 것
비버리 힐즈 거리 풍경
인생은 어느 시기 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단다. 또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선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고. 황혼기라면 자연이 주는 비타민인 여행이야말로 쉼표가 아닐까. 해서 몇 년 만에 친구들 9명과 함께, LA로 가서 라스베가스와 3대 캐년을 관광하는 여정을 잡았다. 나는 LA만 오면 설렘이 옹달샘마냥 퐁퐁 솟는다. 몇 십 년이 한결같고 신실한 여고단짝 경이 살고 있어서다. 일단 공항에서 경에게 도착신고부터 하곤, 일행과 시내관광에 나섰다.
LA시내는 보통 스타의 거리인 헐리우드, 패션의 거리 로데오, 낭만의 거리라 일컫는 선 셋 블루버드, 부촌의 상징인 비버리 힐즈로 나뉜다. 한인 타운이 차이나타운과 리틀 도쿄를 합친 것보다 5배나 넓단다. 과연 올림픽블루버드와 버몬트거리는 완전 한글간판이 장악해, 어깨가 절로 펴진다.
처음 간 곳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극장(2012년 코닥 회사 증발 후 Dolby로 개명)이 있는 복합쇼핑몰
이다. 아담한 바빌론광장을 둘러싼 빌딩 벽엔 대형부조들을 새겼다.
바빌론 시대의 개선문 짝퉁도 있다. 광장의 파수병들 인지 이오니아식 기둥 위 반석엔 거대한 코끼리상과 피라미드가 있다. ‘내가 지금 중동에 왔나?’ 라는 착각이 1초쯤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럼 영화 세트장?’ 번개처럼 영화 십계에서 거대한 스핑크스를 만들던 장면과 오버랩 됐으니까. 잠깐 혼란스럽던 차, 광장의 분수랑 노는 아이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와서야, LA인 걸 재인식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코닥 극장의 외벽만 본 다음, 유명한 레드카펫을 밟아봤다. 시상식 날이면, 대단하고 호화롭게 비추던 그 레드카펫이 그지없이 촌스럽고 평범하다. 같은 옷이라도 입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과 마주하니 실소가 나온다.
쇼핑아케이드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제법 넓은 발코니 같은 공간이다. 실인즉슨 모조개선문의 지붕이다. 사람들이 복작거려 의아스럽던 찰나, 정면으로 멀리 할리우드란 글자를 보고서야 알았다. 너도 나도 그 사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들을 찍는 거라는 걸. 그 사인의 유래는 Hollywood Land라는 주택단지의 광고목적으로 세웠던 거였다. 나중에 끝의 네 글자를 떼 내곤 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된 거고. 그러던 어느 날 전도유망한 남자배우가 그곳에서 자살하는 바람에 접근금지 구역이 됐단다. 이렇게 멀리서 사진 찍는 명소가 탄생케 된 배경이다.
가구점도 없는데 구석에 커다란 침대가 덩그마니 있으니 의문부호다. 알고 보니 마릴린 몬로가 사용했던 이른바 ‘마릴린 몬로표’ 침대였다. 다른 물품도 아닌 침대가, 가림 막이나 덮개도 없이 노천에서 나뒹굴듯 하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생전의 인기와 추모의 정이겠지만, 이건 사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모든 이들이 침대 앞에서 뭘 상상할까? 기껏, 그녀가 생전의 인터뷰 때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물음에 ‘샤넬 5’했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의 연장선상일 게 빤하다.
사람들이 침대에 앉고, 쓰다듬고, 비스듬히 누워 사진을 찍거나 하니까. 모든 게 생각 나름이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어쩐지 요절한 그녀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아, 자꾸 하늘이 쳐다봐진다. ‘정말 이건 아닌데.’ 이것도 나만의 문화적인 관념차이?
그 다음 간 곳이 배우들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는 맨스 차이니스극장(Grouman’s Chinese Theatre Court Yard)이다. 빨간색 건물인데 지붕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모양새가 영락 없는 중국풍이다. 중국에 흔한 음산한 절간 같은 촌스런 외양이다. 문득 의구심이 든다. LA만큼은 단연코 한인 타운이 우세한데 왜 하필 중국극장 앞이람? 1927년에 시작된 극장의 행사였다니, 이민역사에선 우리가 눌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그래도 샘난다.
극장 앞마당엔 사람들이 꽉 찼다. 사금이라도 줍는지 고개들을 숙이고 뚫어져라 시멘트 바닥을 살핀다. 각자 흠모하는 연예인들의 발 도장<거의가 구두도장> 손도장과 사인들을 찾는 거였다. 옛 명우들을 위시해 현존명우들까지 기라성 같은 유명인 들은 다 있다.
그런데 거친 시멘트바닥에 새겨진 사인판 들이 바둑판처럼 규격 있게 분할되지 않았다. 좌우앞뒤 판과의 경계선의 길이가 다 제각각이다. 마치 땅뺏기놀이 때 그어지는 금처럼 무질서하다. 명예스럽게 다가와야 할 사인들이 실없는 애들 장난같이 여겨지는 이유다.
더한 건, 통로가 별도로 없다보니 사인들이 뭇사람들에게 밟힐 운명이다. 미안하지만 나도 막 밟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이름이란 얼굴이나 마찬가진데 이리저리 밟히고 뭉개져도 되는 건가. 내 주관 상으론, 영광과 명성을 기리는 취지였다면, 적어도 발길세례만큼은 면케끔 조성됐어야 옳았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이름 만큼만 살아간다면 세상이 훨씬 밝아지겠지요. 제 이름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쉽나요?”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지만, 이름이란 그만큼 무겁고 숭고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듣던대로 스타의 거리(Fame of Walk)는 좀 격상되고 차별된 편이다. 보도의 재질이 맨 시멘트가 아닌 고급이고, 모자이크 동판에 새긴 별도 색깔을 가미해 돋보인다. 친절하게도 업적 분야별로 로고까지 별도 표시돼 있다. 이를테면 탤런트는 TV세트, 뮤지션은 레코드, 라디오분야는 마이크, 영화는 영사기가 새겨져 정성이 깃든 인상이다. 별들 사이에 공간이 있어 구태여 이름들을 안 밟고도 통행이 가능해 마음이 편하다.
인제 소위 미국최고의 명품쇼핑가라는 로데오드라이브다. 로데오란 어원은 스페인어로 ‘물이 몰려드는 대목장’인데, 물대신 명품과 사람들이 몰려든다. 척 떠오르는 게 영화 프리티 우먼이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줄리아 로버츠가 명품상점에서 옷값을 물었다가, 미운오리새끼마냥 문전박대 당한다.
다음날, 창이 넓은 까만 모자에 하얀 원피스로 쫙 뽑은 우아한 명품 백조로 변신해, 예의 그 상점에 다시 들린다. 그리곤 한껏 오만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업신여겼던 점원들을 향해 멋지게 한방 먹인다. “너희들 큰 실수했어. 거대한.” 그런 다음 양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있는 쇼핑한 백들을 보란 듯 흔들며 의기양양 걸어 나오던, 바로 그 길이다. 대중들에게 고소함을 안겨줬던 그 명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인다.
길 한복판엔 역발상이 주효해 관광거리로 등극된 나체동상이 있다. 앞은 분명 볼륨이 풍만한 여자인데, 뒷모습은 멋진 근육질남자인 이른바 ‘반녀반남’이다. 뭐든 기발하고 비틀어져야 튀는 요지경 속 세태 탓에 출생한 인물이겠다. 내 눈엔 가위표다. 차라리 아담과 이브마냥 나상을 두 개 세웠으면 더 예술적이겠다. 내가 또 너무 편협하고 고루해 그런가.
그다음 방문지가 부촌의 대명사인 비버리 힐즈다. 자체적으로 경찰과 학교가 있고 법규마저 독자적이다. 다시 말해 행정적으로 완전 분리된 구역으로, 버스는 아예 출입금지일 만큼 폐쇄적이다. 1992년 4, 29폭동당시 얘기다. 폭도들이 이곳을 겨냥하고 달려 들까봐,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하게 철통경비를 했단다. 대신 폭도들의 표적을 유도하듯 슬쩍 한인 타운 쪽으로 길을 열어 놓았단다. 예측대로 폭도들의 화살은 엉뚱하게 한인 타운으로 튀었고, 안타깝게도 애꿎은 한인들만 희생양이 돼서 무참하고 철저하게 당했던 것이다. 그런 빌미를 제공했던 지역이다 싶으니 은근히 심사가 꼬인다.
정 가운데 높은 언덕위에 있는 독보적이고 위압적인 저택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집이란다. 세계인들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명감독이니, 저런 왕궁에서 살 자격이 충분하지 싶어 배도 안 아프다. 높은 담에 가려진 주황색 지붕의 저택들과 정원들이 척 보기에도 돈으로 미역을 감은 별천지다. 가이드가 저 집은 유명한 어느 누구, 이 집은 어느 배우의 집 등 설명을 해도 관심이 안 간다. 솔직히 하나도 안 부럽고 괴리감만 느껴진다. 한마디로 말해 ‘좋은 집이 좋은 가정’이란 등식은 절대 정답이 아니니까. 어느 집이건 한 가지씩이라도 아픔 없고 문제 없는 집은 없을 거니까.
마지막으로 Farmer’s Market이라는 Open Air 마켓에 갔다. 쇼핑의 메카라는 The Grove Mall에 이어져있다. 올드패션 아이스크림과 치즈케이크 공장, 유서 깊은 식당으로 유명하다. 솜사탕과 기념품, 이국적인 장신구들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다민족 문화도시’라는 LA의 특성을 대변해준다. 중앙광장엔 분수 쇼를 하는 연못과 앙증맞은 다리와 정자도 있는데, 라이브뮤직공연도 열린다니 볼거리도 풍부하다. 게다가 웬만한 브랜드의 상점과 극장도 있으니 연인들이 약속 장소로 애용하는 게 당연하다. 또 옛날 한국영화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서울역의 시계탑보다 더 높고 멋진 시계탑까지 있다. 나라도 여기서 만나자고 하겠다.
여행지에서의 제일 큰 즐거움은 생소한 추억과 경험을 쌓는 거기에, 이곳의 진짜명물인 트램을 탔다. 트롤리버스라고도 하지만 레일 위를 가는 거니 미니전차다. 밝은 초록색 몸통에 이층인 작은 한 칸짜리라 장난감 같다. 양쪽 옆이 트였고 나무로 된 의자가 벤치 형이라 마차를 탄 기분이다. 비록 한 블록거리의 공짜전차지만, 오랜만에 잃어버린 한 시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어볼 만큼은 됐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오니, 로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경이 반색하며 맞아준다. 참 미안하고 고맙다. 열일 제처 두고 무조건 날 만나러 와준 친구를 보는 순간, 비행기 값 본전은 찾고도 남았다. 호텔방으로 올라가 모처럼 행복바이러스를 날리며 많이 웃어봤다. 마음이 따뜻이 오가고 편안한 친구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고향처럼 정답고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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