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그리운 내님은 어디 계신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이때에
위의 시는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 중국 당(唐)나라 때 설도라는 여인이 쓴 5언절구시 인 춘망사의 첫 구절이다. 다음 구절은 “풀 뜯어 한 마음으로 매듭지어(攬草結同心) 임에게 보내려 생각했지만(將以遣知音) 봄시름에 속절없이 끊어 버리고(春愁正斷絶) 봄새는 다시와 애달피 우네(春鳥復哀吟)” 그리고 다음 3절이 김동진 작곡의 가곡 동심초의 가사가 된원래의 구절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시인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 선생이이 시를 번역을 했는데, 위에 본 바와 같이 번역은 원문과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보다 더 잘된 번역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싶도록 선생의 번역이 우리들의 가슴에는 더 와서 닿는다. 아마 여인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그리움을 한국 정서에 맞도록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문학의 백과사전 쯤 되는 <中文百科在線>에 의하면 설도는 원래당 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출생으로 어려서 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 지방으로 전근이 되면서 따라와 거기서 쭉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설도는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설도에게 “뜰의 오동나무가 구름 위에 솟으니(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하고 운을 떼이니 8세의 설도는 그 자리에서 “가지가 남북조를 맞이하고 잎이 동서풍을 보낸다 (枝迎南北鳥 葉送東西風)” 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하자 설도의 모녀는 졸지에 가장을 잃은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설도가 16세가 되었을 때 악적(樂籍: 몸을 팔지 않는 고급 기생)에 이름을 올렸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설도가 18세 되었을 때 당시 사천(泗川) 절도사 위고(韋皐: 745-805)의 눈에 띄어 이후 절도사의 적극적은 보살핌과 후원을 받아서 시인으로의 설도의 명성은 성도일대 뿐만 아니라 당시의 수도 장안에까지 알려 졌다. 설도는 당시 내노라하는 문인이였던,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왕건(王建), 장적(張籍) 등과 격의 없는 교류를 나눌 정도로 미모와 학식이 뛰어났다.
설도가 35세 되던 해 후원자이며 애인이었던 위고가 죽자 설도는 이후 고독한 만년을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외로운 여류시인에게 한 남성이 운명처럼 나타났다. 감찰어사로 성도에 출장을 온 원진(元縝)이라는 시인이다. 그러나 설도 보다 나이가 10년이나 아래였던 원진은 그나마 이미 처자가 있는 몸. 설도와 꿈같은 며칠을 보낸후 배를 타고 떠나서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하는 춘망사는 떠난 후 소식이 없는 원진을 그리워하는 설도의 애절한 심정이였다. 다음은 춘망사의 마지막 4절 동심초이다.
어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그리움 못 잊어 꽃이 된 것을 (飜作兩想思:번작양상사)아침에 거울 보며 울었다는 걸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동심초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꽃일까 식물도감에 찾아도 없어서 궁금하던 차에 중국 한의학 전공하신 이웃의 박경용 박사가 도움 말씀을 주셨다. 동심초는 수선화科로 일명 상사화(相思花: 학명은 Lycoris squamigera).
그런데 동심초는 꽃이 필 때는 잎은 이미 말라있고, 꽃이 지고나면 잎이 다시 돋아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서로 이루지 못할 사랑. 그래서 동심초는 이별꽃이라는 별명도 있다.
비가 그친 요즈음 날씨에 우리 동네 Rossmoor에는 봄맞이 꽃들이 여기저기 활짝 피어 있다. 봄볕을 즐기며 꽃 사이로 걷는 동네 아낙들의 모습이 모처럼 한가롭다.“ 어찌나, 가지가득 피어난 저 꽃. 그리움 못 잊어 꽃이 된 것을” 우리 집 입구에 핀 아름다운 철쭉꽃, 이 꽃은 어느 여인의 그리움이 변하여 꽃된 것일까.
설도의 시만 모았다는 금강집(錦江集)에는 설도의 시500여 수가 수록되어 있었다는데 明나라 초에 망실되고 지금은 88수가 남아있다고 문헌은 전한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가곡동심초를 작곡한 김동진 교수는 지난 2012년 102세 천수를 누리고 별세하셨고, 번역 작사자 김억 선생은 6.25때 납북된 후 생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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