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뷰 - 강연차 LA 온 ‘당대의 문장가’ 고종석
▶ 기자란 직업에 가장 애착, 생계 위한 글 안 쓰려 절필, 인터넷의 언어 생략·파괴, 시대 따른 파격으로 봐야
한국 최고의 문장가요 소설가이며 언어학자이고,기자였던 사람을 인터뷰하여 기사를 쓰는 일이얼마나 부담스러울지 생각해본 일이 있나 모르겠다. 깐깐하고 정확하고 유려한 글, 유명 논객들조차 꼬리를 내리는 촌철살인의 칼럼니스트, 책임있는 진보주의자요 모든 소수자와 불순한 것들을 옹호한다는 이 시대의 희귀한 지식인 고종석은모든 기자들이 만나보고 싶어하는첫 번째 언론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세월 기자로서도 화려한 족적을 남겼지만 언어학자로서 한국어의 말과 글과 언어에 관한 예민하고 집요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많은 책으로 펴낸 그는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와불어, 스패니시에도 정통한 글로벌 링귀스트다.
문학작가로서도 장단편소설을 여러 편 썼는데 몇해 연이어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꼽힐 만큼 우수작이 많다. 그런가 하면 언론인으로 정치에 대한 직설적이고 소신 있는 주장에도 서슴없어서 그의 칼럼들은 한국사회에서 대단한 반향몰이를 하곤 했다. 최근의 대표적인 것이 2012년 절필사건과 작년 12월22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낸 사임종용 편지다.
27일 재미수필가협회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남가주 7개 단체와 대학의 초청강연 차 LA에 온 고종석(55)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많은 동료들이 와서 알은 체를 하고, 어땠냐고 묻고,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뒤늦은 인사를 전한다. 어땠냐고? 음… 하도 예리해서 머리에 칼이라도 달린 줄 알았던 고종석이란 사람은 구겨진 옷을입고 소탈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편안한 ‘아저씨’같은 남자였다. 날카로운 눈매는 감출 수 없었지만 큭큭 웃을 때마다 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마주앉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좋은 인터뷰이.
자기도 기자였으면서 일어나면서 하는 말이 “기사 좀 잘 써주세요!”다. 갑자기 펜대를 넘기며 겸손을 부리는 그 배려와 여유도 멋있는, 이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 지면으로 압축해야하는 점이 유감스럽다.
△언론인, 소설가, 언어학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이 가장 좋은가
▲기자다. 나의 첫 직업이었고(그는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시작해 한겨레, 시사저널, 한국일보에서 일했다) 4년 전 한국일보를 나올 때까지 기자로 글을 썼으니 가장 애착이 간다고 하겠다.
△그런데 절필선언을 했다
▲2012년 9월 한겨레 칼럼에서 직업적 글쓰기를 안 하겠다는 절필선언을 했다.(일부 옮기면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오늘로, 직업적 글쓰기를 접는다”) 지금은 트위터 등을 통해서만 글을 쓰고 있다.
△직업적 글쓰기란 무엇을 말하나
▲돈을 받고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물론 아주 후에 회고록을 쓴다든가 정말 쓰고 싶은 게 있으면 쓰겠지만, 일단 생계를 위한 글쓰기는 안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 이후엔 하나도 안 썼다. 그러나 절필 후에 책이 몇권 나오긴 했는데 장편소설 한 권(‘해피 패밀리’)과 단편소설 선집(‘플루트의 골짜기’)이 나왔다. 또 작년 9~12월에 열었던 12회 글쓰기 강좌를 녹취한 것이 곧 2권의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 ‘문장가’라는 서술어가 좀 특별하게 여겨진다
▲누가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도 칭찬이니까 자랑스럽고 고맙게 받아들인다.
△LA는 첫 방문이다. 해외 이민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언젠가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런 말을 했는데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면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주류사회에 동화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게 좋다고 본다. 그게 한국에 더 도움되는 길이다.
△그럼 2세들의 한글교육도 필요하지 않다고 보나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환경이 된다면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는 게 좋겠지만 억지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결국 미국에서 뿌리 내리고 살건데 미국 교육제도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게 낫다고 본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한국인의 뿌리와 문화, 언어를 강요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풀타임 기자로 일하면서 책을 26권이나 썼는데 원래 글을 쉽게 쓰나
▲스스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글을 쉽게 빨리 쓰는 편이다. 기사도 마찬가지여서 원고지 시절에도 파지 안 내고 마감하곤 했다(언어에 관한 책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은 파리에 있을 때 8일만에 탈고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그렇게 놀라운 언어감각과 글쓰기 재능은 타고난 것인가
▲어떤 분야라도 타고난 재능 없이 정상에 오를 수는 없다. 특히 음악과 수학, 물리학 분야는 그야말로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것이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다. 글쓰기에 관해서는 타고남과 노력이 반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집을 많이 읽는 게 좋다. 모국어의 정수는 산문보다 시에 있다. 산문을 잘 쓰기 위해서라도 시를 읽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 감수성이 뛰어나고 어휘 선택에 많은 공을 들이므로 시를 읽다 보면 한국어가 정말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한국어만큼 문어체와 구어체가 다른 언어도 없는 것 같다. 이유가 뭘까
▲문어체와 구어체뿐 아니라 방송체, 신문체, 일반어체가 다 다르다. 외국인들이 교과서만 보고 한국어를 배우기는 정말 어려운 언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말이 경어체가 복잡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한국사람들은 대화할 때 상대와의 위계가 정해지지 않으면 한마디도 못한다. 서열상 누가 위이고 아래인가를 알아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비민주주의적 언어라 할 수 있다.
△블로그나 트위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생략과 파괴가 많다. 언어의 진화인가 퇴화인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본다. 언어는 끊임없이 진화하는데 그 진화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특히 어휘부에서 풍성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들이 결국은 훗날 표준어로 인정될 것이다. 표준어라는 게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속 쓰면 표준어가 되는 것이니까.
△품위 없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우려된다
▲ ‘사회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규범 한국어는 있으니까 크게 걱정 안해도 된다. 인터넷에서 막말하는 사람이 입사를 위한 자기 소개서에 그렇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롭지 않은가 그 발랄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거친 언어들은 걸러지고 그 중 극히 일부가 규범 안으로 들어올 테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어를 죽이고 비틀기도 하는 것은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SNS 신조어가 한국어만큼 파격적이고 신선하고 풍성하게 나오는 언어는 없다. 이런 것은 막지도 못하지만 다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 ‘해피 패밀리’에서 글과 사람이 같은 경우가 없다며 글의 위선을 지적했는데 그럼에도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글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은 인격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미화와 치장이 없는 글은 없으니까. 글 쓰는 대로 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위선이 있고 사람들은 착한 척하는 것이다. 그게 위선의 미덕이다. 만일 사람들이 착한 체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날을 세운 글을 여러번 썼다. 최근에는 사임하라는 편지를 썼는데
▲우리나라는 87년 6월항쟁 이후 점차 민주화됐고, 대통령 선거에서 잡음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박근혜의 정통성에 치명적이라 생각한다. 그 때문에 선거 결과가 바뀌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명백하게 선거법 위반이므로 특검으로 사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채동욱 사건을 일으켜 덮어두라는 사인을 준거니까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일보 독자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정파에 휩쓸리지 않은 신문다운 신문이기 때문이다. 불편부당이란 말은 낡은 말이지만 신문기자들이 언제나 새겨야 할 말이다. 그리고 그걸 지켜온 신문은 한국일보밖에 없다.
●고종석 강연일정
*어바인 문화포럼 공개강좌(3월29일 오후 5시): 디아스포라의 인문학 (949-892-8315)
*UCLA 한국학연구소 강의(4월2일 오후 3시30분):‘감염된 언어’ 영역본
*오렌지글사랑 강의(4월4일 오후 7시):‘한국어답다는 것’의 의미 (714-552-5488)
*글마루 문학캠프(4월5-6일): 글은 왜 쓰는가? (909-348-2702)
*C메이 갤러리 아트 아카데미(4월9일 오후 6시): 디아스포라의 인문학 (310-922-3885)
<글 정숙희·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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