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관객 수 천만 명을 기록하고 미국에서도 절찬리 상영된 영화 <변호인>을 얼마 전 보았다. 80년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보고 겪었고, 한 동안 잊고 지내던 장면과 기억들이 흑백 영화처럼 함께 떠올랐다. 박종철 사건과 6.29 선언 등의 혼란 속에서 마스크가 없이는 등교할 수 없던 대학 시절. 정의나 사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끓는 젊음과 호기심을 안고 선배들을 몇 번 따라나섰던 시위 현장.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하고,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으로 10여 년을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떤 정치적 견해나 색깔을 갖고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를 논하는 일들이 내게 아득한 사치로 느껴졌던 것 같다. 적어도 5년 전 상담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를 마치고 나오는데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어땠어?” “글쎄… 가슴이 먹먹하네.” “갑자기 왜?”
정치적 색깔이나 한 정당을 향한 소신 없이 살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그 친구에게는 아마도 ‘갑자기’ 피해자들을 향한 가벼운 동정이나 한 정당을 향한 색깔 쯤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갑자기’란 단어가 마음에 울리며, 마이클 샌델과 함께 바람처럼 나타나 서점가를 휩쓸고 사라진 ‘정의’란 단어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물론 필자는 철학이나 인문학적인 ‘정의’에 대해서 나눌 식견이나 자격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잘못된 사회적 구조와 관습과 편견으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보장받지 못할 때, 그 사회에서 한 사람이 겪게 되는 상처와 분노와 절망은 상담사로 살아가는 필자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 상담 수업에서, 상담 대학원의 강령 (mission statement) 중에 ‘사회 정의 (social justice)’가 들어 있어 참 의아했던 적이 있다. 상담 공부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가 ‘상담’과 ‘사회 정의’의 연관성을 얼른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교수님의 이야기가 그 답을 주었다.
“절벽 아래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치료하다 보니,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이 떨어지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절벽 위로 올라가 보니 힘센 이들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약자들을 밀어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절벽 위에서 안 밀면 떨어져 상처입은 사람이 생기지 않을 텐데…“
그렇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여러 종류의 차별 - 인종, 성별, 장애, 정치적 성향, 종교, 교육 수준 등-과 억압과 편견은 개인이나 가족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기게 됨을 영화를 통해 다시 보았다.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건강한 사회에서는 상담이 필요한 사람도 줄게 되는 반비례의 함수가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내담자들 중에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의 편견 등으로 분노와 억울함과 자책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촌지 주는 학생을 편애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설명도 듣지 않고 때리던 선생에게 분노하던 초등학생, 함께 입사한 남자 동료와의 성차별과 상사의 성추행 때문에 겪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치를 떨던 여성 내담자, 동네 어른들이 내뱉은 ‘호로자식’이란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면서 자신을 미워하고 자책하던 남성.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이 이들을 절벽 아래로 떠밀어서 마음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물론 사회 구조만이 전적으로 이들 상처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올바른 정책과 사회 구조로 정의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하드웨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편견과 잘못된 관습의 ‘소프트 웨어’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 구조는 능력과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상담사는 상처 입은 자들의 힐링을 도와줄 뿐 아니라, 약자를 절벽 아래로 떠밀고 있는 잘못된 사회 제도와 정책, 사회의 편견과 잘못된 관습을 개선하는 일에도 목소리를 내야 함을 훈련받고 배운다. 그러나 어디 상담사 뿐이겠는가? 한 사회에서 ‘역할의 옷’을 입고 사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편견과 차별과 불평등의 시선을 돌아보고, 자신이 서 있는 그 곳에서 사회 정의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책임과 특권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