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보기관들을 감독하는 연방상원 정보위원회의 다이앤 파인스타인 위원장(80)은 흔히 ‘졸고 있는 감시관(sleepy watchdog)’으로 불려왔다. 리버럴의 본거지인 샌프란시스코 시장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연방 상원 22년 경력의 민주당 원로이지만 공화당 매파 못지않게 정보기관들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였다. 말썽 많은 대규모 도청도 테러작전에 필요한 무기였다며 감싸고 두둔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대노했다. 지난 주 11일 상원에서 40분의 긴 연설을 통해 작심한 듯 중앙정보국(CIA)을 향해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9.11 테러이후 부시 시절 테러용의자 불법구금 및 고문 실태’에 대한 상원정보위의 조사를 방해한 CIA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며 엄하게 질타했다 :
“정보위의 컴퓨터를 불법수색하고, 주요문건을 삭제했으며, 이 문건을 입수했던 상원보좌관들에 대한 처벌위협을 암시했는가 하면…” 법무부에 수사를 요청한 이 같은 파인스타인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CIA의 심각한 권력남용은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부시시절 CIA국장을 역임했던 포터 고스는 이임하며 이렇게 조언했다 : “아무 것도 시인하지 말라, 모든 것을 부인하라, 비난당하면 반격하라” -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은 듯 존 브레넌 CIA국장의 반격도 같은 날 즉각 나왔다. 그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정보위가 CIA를 해킹하여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기밀문서를 불법 입수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법무부에 수사를 요청했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같은 민주당, 정보분야 두 거물의 팽팽한 기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상원정보위가 CIA의 고문행위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한 것은 2009년 초였다. CIA가 고문 동영상을 파기했다는 언론폭로가 계기가 되었다. 2012년 말 4년에 걸쳐 4천만 달러의 예산을 들인 6,300여 페이지의 보고서가 완성되면서 정보위는 보고서 공개를 가결했으나 이견을 제기한 CIA의 기밀해제 반대로 유보되었다.
한쪽은 덮으려하고 한쪽은 파헤치며 지난 5년 동안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양 기관의 신경전이, 공개결정을 기다리며 보고서에 마지막 손질을 가하던 중 만천하에 드러나는 공방전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기싸움의 핵심은 “미국이 9.11 알카에다 공격에 대응으로 외국인 테러용의자를 구금하고 고문한 방식에 관해 역사에 어디까지 밝힐 것인가”다. 다시 말하면 CIA의 고문관련 행위를 “어느 선까지 공개할 것인가”이다.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문건이 바로 ‘파네타 보고서’로 불리는 CIA의 내부보고서다. CIA가 정보위 보좌관이 불법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문건이며 정보위 컴퓨터에서 삭제된 내용이다.
오바마의 첫 CIA국장인 리언 파네타의 지시에 의해 CIA요원들이 작성한 파네타 보고서는 테러용의자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심문에 대한 요약과 분석으로 고문이 정보획득에 별 효과가 없었다는 평가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브레넌 국장은 “아직 심의 중인 민감한” 기밀사항이라고 주장하지만, 유사한 내용의 정보위 보고서 결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문건인 셈이다.
9.11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 중 이라크 침공을 제외하면 가장 논란을 낳은 이슈가 바로 고문행위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의견을 보태는 통에 요즘 워싱턴에선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가?”를 추적하는 스파이 게임이 한창이다.
공화당 매파에선 CIA의 불법해킹이 밝혀질 경우 “상원 대 CIA의 전쟁이 선포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가하면 티파티의 기수 랜드 폴 상원의원은 19일 UC버클리 강연에서 정보기관들이 “권력에 만취된 상태”라며 “CIA가 연방의회까지 감시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파인스타인 위원장은 “비미국적이고 잔인한 구금과 고문이 다시는 결코 허용되지 않도록…이번 투쟁을 앞으로 의회가 정보기관을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로 삼겠다”고 천명한다. 브레넌 국장은 CIA의 어두운 과오를 인정한다면서 “이젠 과거의 일로 덮고 나가자”고 호소한다.
정보위 보고서의 공개 수준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양측은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비난과 반격이 거듭되는 공방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국가안보라는 명분하에선 무자비한 고문도 정당화될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떤 긴급 상황에서 다시 허용될 수 있는지는 정치인들에게도, 일반국민에게도 대답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질문이다.
덮고 넘어가든, 정보기관에 대한 개혁의 계기로 삼든 일단 첫 단계는 보고서의 공개다. 국민적 합의의 가닥을 잡기위한 논쟁이라도 계속하려면 진상부터 정확히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다음 순서는 보고서 내용을 언제 어느 정도까지 공개할 것인지, 백악관의 결정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