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계속 만나야 하는 날이 지속되면 집에 올 때 나의 뇌는 엉크러진 실타래처럼 되어 내 의식은 녹초가 되고 때로는 우울하기까지 하다. 나는 내 존재 속으로 들어가야만 마음이 편한 비사회적인 인간이 되었나 보다. 이런 밤, 나는 나의 단순함을 되찾기 위해 침대에 누워 거의 반세기동안 늘 내 침대 옆에 있는 시집을 읽기 시작한다. 이 시집은 나를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으며 나의 영혼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 詩들은 나에게는 기도서이며 예언서이고 또 묵시록적이기도 하여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내 머리가 복잡해질 때 나는 달팽이가 되어 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세계와 단절시키며 이 詩 속에서 나를 숨쉬게 하고 정화시키며 또 나를 생성시키는 힘을 얻는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양성생식이 아닌 단성생식자들의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기존재 속에서 자족하며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연 속에서조차 어떤 빛과 형상을 찾기 위해 홀로 가야 하는 고독한 자들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목적이 아니라 길이기 때문이다. ‘낱말’이란 원래 특정한 존재를 위한 형상이자 상징이라고 했다. 나는 이 詩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와 형상을 머릿속에 그렸다. 또 지웠다하며 나만의 세계 속에 빠진다. 그러면 밤의 시간은 온통 수많은 형상들이 연상작용이 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이 실제로 내가 보았던 사물이었는지 내 이미지 속에 사물인지 분간이 안되고 그것이 온통 혼합되어 바다처럼 밀려오고 또 바람처럼 우주 속으로 흩어진다. 또 연속된 형상들이 내 기억에 없었던 무의식의 지층들이 종이처럼 하나씩 그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 터키에서 본 지하 속에 세워진 수많은 큰 기둥, 그 기둥에 새겨진 거꾸로 된 메두사의 얼굴조각--짐승을 물어뜯는 사자상--부서진 성모마리아의 황금빛 모자이크--경지에 오른 고승의 불상조각--아씨씨의 풍경--프랑드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애기의 여리고 여린 손--근대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흑백사진의 얼굴들--말러 심포니 No3를 중간휴식없이 전곡을 연주하고 열광하는 청중들에게 녹초가 되어 인사하던 지휘자 얼굴의 광휘--수없이 높았던 돌계단의 기억--낮과 밤의 열기가 너무도 달랐던 돌담의 감촉--계단 꼭대기에 앉아 내가 태어난 집을 바라보던 그 깊고 그윽한 풍경--러시아 뮤지엄의 ICON--또 계속되는 형상들 "변용이 아니라면 무엇이 너의 절박한 사명이랴" 시인이 다시 살아나 쩡쩡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내 의식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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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가의 정신을 좀 분석하고 싶은데...” 얼마전 어느 정신과의사가 내 화집을 보고 흥미진진해 한 말이란다. 사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의 초상화다. 헌데 나는 예술가들의 정신분석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의 개인적 무의식의 세계는 창조의 보고(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이 과거의 기억이 이미지가 되고, 현재의 직관이 되며, 미래의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 속에 저장된 무의식은 신비하고 또 신비한 것이다.
이 신비는 DNA라는 길고긴 가족사와 개인의 경험과 감동과 느낌들 그리고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과 풍경까지도 다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산맥이다. 그 경험이 회의적이었든 아름다운 것이었든 고통스런 것이었든 모두 환원되고 승화되어 예술로서 꽃피울 때 찬란함이 된다. 이렇게 승화될 때까지 많은 통찰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이 겪은 트라우마가 강렬할 때 예민한 예술가에 뇌세포에 쌓여 그것이 작품화할 때 엄청난 걸작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사명이고 또 의무다. 문학에서는 카프카, 화가로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 예다. 이렇게 인간의 뇌 속에 복잡하고 거대한 층을 왜 학문으로 풀어야 하는지... 나는 가끔 히틀러가 미술대학에 합격해 그의 광기를 예술로 승화했다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그의 재능-독창성-비물질적인 면-또 광기와 이미지, 그리고 그의 역사의식...등. 아마 화가가 되었다면 피카소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홀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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