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아흔아홉에도 화장을 하는 이유가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내가 이 나이에도 글을 쓰는 까닭은 남에게서 칭찬을 받기 위해서 라는게 솔직한 나의 고백일 것 같다. 오늘도 습관처럼 마누라가 내 글쓰는 방, 문을 빼쪼롬히 열고 고개만 살짝 뒤밀고는 “눈도 좋지 않은데, 제발 그만 쓰소!” 란 말을 던져 놓고 살며시 문을 닫고는, 부엌 쪽으로 걸어 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온다. 그런데 할멈이 ‘제발 그만 쓰소’란 말 속에는 기왕 글을 쓸바에는 남에게 칭찬 받는 글을 쓰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지난날, 정확하게 말해서 인터넷이란 용가리가 신문 부수(部數)를 갈가 먹기 전, 그러니까 내 글의 독자층이 제법 두터웠던 당시에, 우리가 마켓이나 식당에 가면 쌩판 모르는 분이 다가 와서 “주 평 선생님이시죠? 선생님의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글을 쓴 당사자인 나보다 마누라의 입가에 엷은 뭉게구름 같은 미소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본다.
내가 작가로 데뷔한 이후 61년 세월 동안 무던히도 많은 글을 쓴 것 같다. 이런 과정에서 지독히도 상복(賞福)은 없었지만 출판사를 잘 만난 복은 있었던지, 다음달에 발간될 제5수필집 ‘추억의 강에 띄우는 쪽배’를 포함 해, 35권의 책을 펴 냈다는 사실은 나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
한글 독자층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새삼 글쓰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있다면, 그건 인터넷으로도 내 글을 읽는 독자가 꽤 있다는 사실과 내가 새로 출석한 교회에서 내 글에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는 90살이 넘은 할머니 교인과의 만남 때문이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사람의 손목을 꼭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정말 보기 좋다!” 란 말이 들려 왔다. 뒤돌아 보니 바로 그 내글에 애정을 지닌 그 할머니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사람을 보고는 “이 사모님이 바로, 그 삼랑진(三浪津)처녀네!” 라면서 빙그레 웃었다. 마산이 고향인 집사람을 보고 삼랑진 처녀라고 말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연의 근원은 1958년 내가 30살 노총각 시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현대문학 1차 추천 2개월 전인 그 해 초봄, 나는 아버지의 재촉에 못이겨 서울의 민씨(閔氏)가문의 처녀와 맞선을 본적이 있다.
내가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다방에 도착하면서 입고 간 옷이, 여우털 색깔의 인조털로 만든 허름한 반코오트에다 겨드랑이에는 두툼한 문학서적까지 끼고 갔다. 먼저 와 있던 민양이 내 옷차림을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벌레 씹은듯한 이그러진 표정이 깔리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티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고 있었지만, 우리 사이의 대화는 한치도 피어 오르지 않았다. 그 다음날 전해 온 민양의 대답은 “흥, 내가 미쳤어? 그런 딴따라에게 시집 갔다가 굶어 죽게!”였다. 맞선 1라운드에서 보기 좋게 K.O 패(툇자)당한 나는 그로부터 한달 후, 맞선 2라운드를 치루기 위해 우리 교회 박목사님과 함께 남행열차 통일호에 몸을 담고 달려간 곳이 부산과 마산의 갈림역(환승역)인 삼랑진 역이었다.
거기서 나는 또다른 분이 중매한 부산 성지초등학교 교사인 이양 쪽으로 먼저 갈 것인가, 아니면 같이 온 박목사님이 중매 선, 마산우체국에 근무하는 황양 쪽으로 먼저 갈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생각 끝에 나는 플랫폼으로 달려 내려 갔다. 그리고는 아아러니컬 하게도 목사님이 차창 너머로 지켜보는 가운데, 왼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내리 쳤다. 침이 마산 쪽으로 튀었다. 나는 차 안으로 달려 올라 가서 목사님에게 큰소리로 “목사님, 마산으로 갑시다” 라고 말하자, 목사님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잘 결정 했습니다!” 라며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플랫폼에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호는 부산 쪽으로 사라져 갔고, 이어 부산 쪽에서 마산으로 가는 완행열차가 어두움을 뚫고 우리 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열차는 우리를 북마산 역에 내려 놓았다. 살짝 곰보인 황양의 외삼촌과 그녀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영화 ‘카사브랑카’의 가스등 같이 역사(驛舍)의 조는듯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는 황양이 예뻐 보여 나는 ‘뿅’ 갔고, 황양도 내 마음을 받아 들여 결혼약속의 닻이 마산에서 내려졌었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글을 20년 전에 ‘결혼’이란 제목으로 이 수필산책(자서전)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할머니 독자가 그 글 속에서의 삼랑진 역 플랫폼의 ‘침점’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우리 할멈을 삼랑진 처녀라고 불렀던 것이다.
연극에 있어서 극적인 장면이나, 글에서 인상적인 표현! 이는 그 연극과 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마치 박목월 시인의 시(詩) ‘나그네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처럼/ 그리고 서정주 선생의 ‘국화 앞에서‘의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의 시구(詩句)가, 우리 머리 속에 오래 기억 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그 삼랑진 처녀와 나는 때때로는 뒷끝이 없는 달구새끼 싸움을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5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마주 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Jevi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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