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년 전, 근 삼십여년만에 찾은 한국, 특히 서울은 내가 속해 있었던 도시가 아니었고 난 어디에도 발길할 수 없는 시간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다만 오목교 근처 빈한한 어깨들을 서로 기대고 늘어서 있던 점포들과 지저분한 골목에서 30년 시간의 찌꺼기를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는 모든 영광과 자랑을 안고 사라졌다. 한숨과 회한도 뒤따라 가버리고 고립과 침잠의 시간들 역시 과거의 시간 속으로 갔다. 이번에야말로 비로소 내가 다니던 대학교 교정에 발을 디뎌본다. 구석구석 들러 사진첩을 들치듯이 기억을 꺼내어 본다. 첫 방문 때에는 이 근처에조차 오지 않았었다. 학교를 보는 것이 두려웠고, 흔적이 두려웠고, 나의 황금기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학교는 입구부터가 촌스런 교문은 간데없고,우리가 자전거교습을 받고 테니스 연습을 하던 운동장을 깊이 파 내려가 홍해가 갈라지듯 가운데 길을 내고 양 옆으로 6층에 달하는 유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다니던 미대의 고풍스런 석조 건물은 현대적 외양의 낯선 건축물이 대신하고 두어동의 건물 이외에 어디에서도 내 기억의 사진첩과 일치되는 곳을 찾을수 없이 건물도 위치도 모두 바뀌어있다. 오고가는 학생들조차 다른 나라의 사람들처럼 낯설기 짝이 없다. 여기가 과연 내가 그토록 아름답고 치열하게 수년을 보냈던 캠퍼스란 말인가. 그들 역시 그러한 시간들 속에 있는 것일까. 표정들은 긴장되어 보이고 걸음은 빠르다. 나는 투명인간처럼 그들의 눈에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듯 무심히 지나가는 그들 사이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누구라도 말을 걸어주길 기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이 많은 사람이 여긴 웬일일까 하는 표정이라도 지어보이길 기대하며 단 하나의 낯익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두리번거린다. 한꺼번에 농축된 내 모든 열정과 젊음으로 날아 오르던 시절, 먹고사는 일에 희석되고 엷어진 열정에 겨우 매달려 안간힘을 써온 그 이후의 삼십여년을 다 합친 것보다도 그 몇년은 내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오로지 작품과 사랑과 자유에 미쳤었다. 그 어떤 것도 날 가로막지 못했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또 밥을 굶는걸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더럽고 치사한 인간들을 맘껏 드러내놓고 조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거칠것 없는 열정은 너무 날것이었고 이방인의 구역으로 밀려다니다 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끌고 추락을 거듭하였다. 어느 누구도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사람도, 밀치거나 가해한 사람도 없었으되 나 스스로 내게 가한 혹독한 시련이었음이다. 죽지도 않고 죽어있는 삶이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바닥 저 아래로 내 팽개쳐진 나를 주워 올린 건 어느날의 한줄기 햇빛과 바람이었다. 바다 끝으로부터, 산 꼭대기 투명한 하늘로부터, 광활한 대지의 심장으로부터, 그보다 더 멀리 전 우주로부터, 그보다 더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결국은 그 모든 것의 시작인 내 안으로부터 비쳐온 한가닥 햇살과 그리로부터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었다. 그 시간들을 채웠던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나를 찾아 떠난 길고도 긴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으로 추락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나라고 여겨지던 것들이었을뿐이었고 나는 한번도 높이 올라간 적도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캠퍼스를 돌아보니 후련하다. 한 단락이 비로소 끝났다. 모든 두려움의 시작을 보았으므로. 과거는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이다.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을 때에야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캠퍼스 입구 유리 건축물을 벗어나며 내 가슴은 외치고 있다. 지나간 시간들이여! 거기 그냥 있으라!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말고 미동도 말고 있으라. 우리가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게 꿈인 것처럼 있으라. 그러나 잊혀지지도 말고 있으라.얼마나 우리가 아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는지, 그 아픔과 고통 때문에 얼마나 우리의 삶이 치열하고도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 있도록 거기 그냥 있으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