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으니 금년의 부동산 경기전망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만 아직은 조금 더 정리하고 분석할 시간이 필요한듯해서 다음기회로 미룬다. 지난번 칼럼에 이어서 오늘은 이곳 미국 어느곳에서나 마주치는 아일랜드출신 이민자들에 대해 얘기해본다. 2008년 시행된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11.9%인, 4000여 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아이리시는 아일랜드 공화국 인구의 여섯 배나 된다는 사실을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와 포드 자동차를 발명한 헨리 포드도 아일랜드계통이다.
1845년 시작하여 1850년까지 계속되었던 기근 때문에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 1845년 아일랜드의 인구는 약 80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1850년까지 기근으로 사망한 사람은 적어도 150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 때 100만 명이상이 더 나은 삶을 찾아 거주하던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였는데 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인구의 1/4이상이 줄어든 6년간의 심각한 기근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아일랜드의 많은 부분을 영국인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작인들로부터 높은 임대료를 거두어들이면서도 품삯을 아주 야박하게 지불하는 랜드로드 즉 땅을 가진 신(Lord)의 위치에 서서 군림을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육류를 비롯한 다른 식품을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가장 저렴하고 키우기도 쉬운 농작물인 감자를 재배하였다. 감자는 1590년경에 아일랜드에 도입되었는데 습하고 온화한 아일랜드의 기후가 감자의 성장에 적당했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농사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람은 물론 동물의 사료로도 사용되었던 감자는 1800년대 중반에는 전체 경작지의 거의 3분의1을 감자 재배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845년 감자역병이 돌았다. 그 전에도 감자 농사가 흉작인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단기적인 구호 조치를 취하여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고 이듬해에 풍작을 거두게 되면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그래서 1845년에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두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였다.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감자역병균은 나라 전체의 감자밭들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오직 한 품종의 감자만을 심었던 아일랜드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정부는 다양한 구제 사업을 벌였으나 추위와 질병이 겹쳐 수많은 사망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소작료를 내지 못해 쫓겨났거나 아예 농토를 버린 소작인들에게 유일한 대안은 해외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850년에는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26%가 아일랜드 사람이었으며 뉴욕의 아일랜드인이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이민 왔을 당시에는 먼저 자리 잡은 영국계 미국인들에게 흡사 개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주류사회에서 떨어진 보스톤 등의 소수 민족거주지 안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들은 온갖 더럽고 힘든 노동으로 착취당하며 ‘2급 시민’ 취급을 받으며 살았으나 한편으로 숫자적으로 우세하여 투표권 때문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니 정치 거물들이 더 많은 표의 확보를 위해 이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56명의 서명인들 중에 8명이 아일랜드 계통이었으며 미국 헌법제정의 창립멤버 36명중 6명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아일랜드계통이 법률 집행이나 수백개의 대학을 비롯한 학교, 고아원, 병원들과 보호 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도 아일랜드계 정치인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서 중책을 맡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도 어머니가 아일랜드계이며 로널드 레이건, 앤드루 잭슨, 허버트 후버 대통령도 아일랜드계통이다. 그리고 아직도 보스턴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정말 많다. 그리고 이민 역사가 200년이 채 안된 지금은 아일랜드인들의 위상은 달라져서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코트를 누비는 보스턴의 농구팀인 셀틱스의 마스코트도 아일랜드민족의 상징인 ‘세인트 패트릭’이다. 또한 아일랜드계인 월터 오맬리는 부동산 중개인이면서 브루클린 다저스의 소유자였다. 그는 1958년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다저스를 LA로 옮겨와 같은 해 뉴욕 자이언츠팀을 샌프란시스코로 옮기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다.
문화적인 면을 포함하여 미국 사회전반에 걸쳐 고난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1902년 12월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겔릭(S.S. Gaelic)호에 탑승하여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으로 우리 한인들의 이민역사가 시작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우리 이민사회도 놀랄 만큼 모든 면에서 성장하였지만 더 큰 도약을 위하여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좋은 롤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 (213)272-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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