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에 거주하는 우리 주변의 타인종 밀집지역에 대해 글을 써 보기로 한 후 지난주 행콕팍의 유대인이었고 이번엔 아르메니안 밀집지역인 글렌데일이다. LA의 한인타운에서 북쪽으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글렌데일시는 LA카운티에서 LA시와 롱비치에 이어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북으로는 라크레센타와 라카냐다, 남쪽으로는 LA시가 있고 버뱅크와 패사디나가 주위에 있다.
9개의 공원과 3개의 골프코스가 있는 30스퀘어마일 가량 넓이의 글렌데일은 ‘나무의 도시’( Tree City USA)로 일컬어질 만큼 도시 전체에 나무와 공원이 많아 거주환경이 쾌적하다.
LA시에서 가까우면서도 쾌적하고 안전한 주거환경과 단독 주택은 물론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콘도가 많아 한인을 포함한 초기 이민자가 주택을 구입하는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한인들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에 비례하여 경찰의 숫자가 다른 도시보다 월등히 많아 LA카운티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약 8만 가구 정도의 주택이 있는 글렌데일은 올해 1ㆍ4분기 단독주택의 중간가격이 64만달러에서 107만달러이고 다세대 주택인 콘도의 중간가는 35만달러에서 50만달러이며 카운티에서 주택가격이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이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글렌데일은 도시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글렌옥스 길을 경계로 북쪽 지역이 더 좋은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고 가격도 높으며 도시의 북쪽에는 주택가격이 몇 백만달러 이상 하는 고급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30만명 정도의 주민 중 아르메니아인들이 30% 가까이 되는 미국 내 아르메니아계 커뮤니티 최대 거주지로 글렌데일 통합교육구에서는 아르메니아 독립기념일을 휴일로 지킨다.
그리고 교통이 좋고 학군이 우수하여 한인 인구도 3만명이 넘어 글렌옥스 길을 가로지르는 퍼시픽 블러버드 선상에는 작은 규모의 한인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마켓과 한인들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편리시설과 한식을 비롯한 식당들도 있어 LA 한인타운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글렌데일에 지난 6월 말 2차 대전중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소녀들을 기리기 위한 ‘평화의 소녀상’ 이 세워졌다. 물론 일본계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아르메니아계의원들이 주를 이룬 시의회의 적극적인 지지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기나긴 세월 주변강대국들의 압제아래서 살아남은 두 민족의정서가 공감대를 형성한 결과로도 보인다.
아무튼, 아르메니아는 서아시아 카프카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북으로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주변에 터키, 이란 등과 인접하고 있다.
때문에 기원 전 1200년께부터 왕조를 이룬 아르메니아는 여러 민족의 주요한 이동통로에 위치해있어서 동서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말려들기 일쑤였고, 수천년동안 속박과 독립이 반복되는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기원 전 6세기께는 당대의 강자였던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으나 페르시아가 망한 후에는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가 기원 전 1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을 점령하여 동방의 최강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그 후 로마의 공격으로 식민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보다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지금도 남자 이름에 ‘아라랏’이 사용된다. 지금은 터키의 영토가 되었지만 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 떠돌다 착륙한 아라랏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에 지배를 받게 되나 몽골이 망한 후에 독립한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상업민족으로 널리 알려지며 번성했다. 오스만 통치 아래 아시아 지역의 상업은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총괄하여 경쟁했다고 했을 정도로 번창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커피를 유행시키고 최초의 카페를 개점한 것도 아르메니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얘기할 때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학살’을 빼놓을 수 없다. 1894년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오스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충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측의 러시아군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 측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은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게릴라 활동을 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들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 내의 반아르메니아인 감정을 일으켰고 곧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이때의 희생자가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아르메니아는 마침내 독립하여 그들의 나라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아르메니아공화국이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자원이 부족하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력도 더 약화되면서 소련에 의하여강제로 주변 나라들과 한데 묶여 1922년 ‘자 캅카스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의한 공산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많은 아르메니안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어 대략 14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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