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았던 오빠가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주위의 친구들 모두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나는 오빠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내 오빠는 별로 자랑할 것이 없었다. 나보다 세살 위의 오빠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얘기를 한 두어달 전에 들었다. 의사는 폐가 거의 다 망가졌으니까 그냥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하면서 큰 언니는 목이 메었다. "이놈아!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아야지 먼저 가면 되겠니?" 그것이 언니가 마지막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어서 가장 불쌍한 것은 그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까운 사람죽었다’라고 말하던지 좀더 살았으면 하고 주위에서 아쉬워 한다면 그 사람은 헛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오빠를 마지막 본 것은 인천 송도에 살던 우리가 한국을 떠나던 날이었다. 짐을 싣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오빠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오빠는 올케에게 막 화를 내면서 나무랐다. 왜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 왔느냐고. 나는 잠자코 오빠에게 마지막 용돈을 내밀었다.
인천에서 소문난 부자였던 우리 집안 재산을 다 말아먹은 장본인이 바로 오빠였다. 내가 미국에 온 뒤로 마지막 남은 재산이던 우리 집안 선산을 팔아 먹은 것도 오빠였다. 그는 우리 살아있는 가족 뿐 아니라 죽은 선조들에게도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그 선산은 인천 앞바다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훤히 뚫린 팔자선의 대로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 당시 함께 살던 사촌들하고만 친하게 지냈다. 오빠는 소심하고 어리숙해서 늘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툭하면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신발짝을 벗어들고 나가서 그들의 머리통을 두들겨 패주었다. ‘이 바보 같은 촌놈들아!’라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해방되기 전 약 2년간을 황해도 연백군에 피난 가서 살았던 우리 가족들은 그곳 벽촌에선 늘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때만해도 시골 사람들은 무명 옷에 겨울이면 검은 물감을 들여 입곤 했고, 아이들도 한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이 보통이던 시절이었다. 화신 백화점에서 산 신식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사람들은 우리 식구뿐이었다.
더구나 그 시절 큰 언니는 내가 다니던 소학교에 선생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하얀 얼굴에 비단 옷을 입은 언니가 피아노를 치면 시골 아이들이 모두 창가에 매달려 그 모습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그 바람에 나는 늘 그런 언니가 자랑스러워 으시대곤 했다. 반면에 오빠는 시골 아이들이 놀린다고 털 모자를 굴뚝 뒤에 감춰 놓고 다녀서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내가 미국에 온 뒤 오빠네 식구들을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당시 오빠는 폐병에다 남의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사기꾼으로 몰려 마지막 미국 대사관에서의 인터뷰에 빨간줄이 쳐지고, 미국 이민의 꿈은 무산이 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오빠는 집을 나가 몇년 동안 어디를 돌아 다니면서 살았는지 지금껏 그것이 미스터리다. 그후 올케가 두 아들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뻔하다. 나도 십여년간 새로 생긴 내 가족들에게 충실하고자 그동안 고국도 가보지 못하고 오빠네 식구들에게도 무심한 채 오랜 세월이 지났다. 가끔 생각이 나면 오빠에 대한 연민보다 마지막 어머니가 숨을 거두실 때 오빠를 부탁한다는 그 유언이 생각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곤 했다.
십여년만에 한국에 가보니 그들은 작은 연립주택을 마련하고 식구들이 모두 일을 해서 밥 걱정은 없었다. 그때가 겨울이었지만 나는 내 형제들 모두를 이끌고 제주도에 한 사나흘 다녀왔다. 좋은 호텔에서 며칠 호강도 해보고 아마 그때 오빠는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오빠가 숨을 거두기 전 올케 손을 꼭 붙들고 얼굴도 몇번 쓰다듬었다는 말을 듣고 그제야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행동은 ‘여보!"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살아 생전 한번도 변변한 남편 노릇도 못해보고 살뜰히 대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배우자에게 그래도 마음 속에선 고마움이 있었나보다. 올케도 그런 오빠를 용서했을까.
’올케, 고마워! 그동안 따뜻한 밥을 해줘서.오빠가 거리의 노숙자가 되지 않은건 모두 올케 덕이야. 이젠 올케만 생각하고 좀 편히 살아봐!’ 나는 그렇게 올캐에게 말해주었다.
내 남편은 오빠가 마지막 올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고 하니까 너무 슬프다고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편안히 갔다니 그게 위안이 되었다. "오빠! 잘가! 그리고 안녕! 영원히!" 밖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