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모두가 급해지는 마무리의 계절이다. 지난 1년 해놓은 일 별로 없어 비생산적인 의회로 낙인찍힌 연방의회의 안팎은 더욱 분주해 보인다. 추수감사절 휴가를 즐기고 이번 주 돌아온 하원은 13일까지만, 다음 주에 돌아올 상원은 20일까지만 문 열었다가 다시 크리스마스 연말휴가에 들어간다.
처리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있는데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그뿐인가, 정국을 마비시키는 ‘양극화 당쟁’은 의회지지율을 사상 최저로 폭락시키고도 개전의 정을 보이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기세다. 후유증이 심각하다. 연초 여론의 응원 속에 초당적으로 출범했던 총기규제안은 죽어버렸고 이민개혁안은 산소호흡기에 매달린 상태다. 정부폐쇄를 초래하고 국가부도사태를 위협한 예산협상은 아직도 당쟁의 볼모로 잡혀있으며 대통령이 지명한 수많은 공직자들이 상원의 인준을 받지 못해 몇 달째 엉거주춤 대기 중이다.
2주전 상원이 감행한 필리버스터 규정 변경안 통과는 워싱턴의 양극화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날로 악화되는 당쟁으로 인한 국정마비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다고 상원 역사의 새로운 한 장을 기록한 민주당은 강조한다.
장시간 연설을 계속해 표결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뜻하는 ‘필리버스터’는 보통사람들에게도 비교적 귀에 익은 정치용어 중 하나다. 지난 9월엔 테드 크루즈가 오바마케어 폐기를 위해 21시간여 연단에서 버텼고, 앞서 3월엔 랜드 폴이 CIA국장 인준을 반대하며 13시간 연설을 이어갔다. 둘 다 반오바마 전선의 선두에 선 공화당 상원의원들이었고 필리버스터 이후 극우보수진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연방상원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심의기관”으로 자부해왔다. 성급한 판단을 지양하고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소수당의 의견을 경청하며 토론과 타협을 거쳐 충분히 검토한 후 가능한 만장일치로 안건이 마무리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소수당의 파워를 허용하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필리버스터다.
의원들의 발언에 제약이 많은 하원과 달리 상원은 무제한 토론을 허용한다. 의원의 발언시간에도 제한이 없다. 장시간 연설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려면 토론종결을 위한 절차표결을 실시해야 한다. 처음엔 상원 100명 전원 중 3분의 2가 찬성해야만 종결시킬 수 있었는데 1975년 변경해 60표로 줄였다.
초당적 합의를 최선의 가치로 평가해온 종래의 상원에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필리버스터 활용은 많지 않았다. 특히 대통령의 공직지명에 대한 인준에선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정치 환경이 점점 양극화로 치달으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필리버스터 남용이 심해진 것이다. 소수당 보이스에 파워를 주기위한 규정이 사사건건 다수당 아닌 소수당에 끌려가는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 것이다. 59명의 상원의원이 찬성해도 41명이 반대하면 죽어버리는 안건이 속출했다.
지난 11월21일 민주당 주도로 상원을 통과한 필리버스터 규정변경 법안은 절차표결의 가결 정족수를 51표, 단순과반수로 낮춘 내용이다. 일반법안 심의와 대법관 인준을 제외한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준안에 한하지만 상원인준을 필요로 하는 정부직책은 무려 1,183개에 달한다. 이제 다수당의 원하는 대로 대법관을 제외한 모든 공직자에 대한 신속한 인준이 가능해졌다.
38년 만에 단행된 워싱턴의 지각변동이다. 민주당은 “전례 없이 남발되는 공화당의 방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상원은 살아있는 기관이고 생존과 국정을 위해선 변할 수밖에 없다”면서 ‘공화당이 자초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한다. 분기탱천한 공화당은 “민주당의 노골적 권력 장악이다…곧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보복을 거듭 공언했다.
필리버스터가 ‘상원의 영혼’이었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필리버스터 무력화는 앞으로 차츰 대법관 인준과 일반법안 심의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책임은 양당 모두에 있다. 사실 필리버스터 규정변경은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이었던 2005년 민주당의 인준방해 때문에 추진했던 사안이었고 당시엔 소수당이었던 민주당이 거세게 반대했었으며 금년 7월에도 민주당이 강력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매번 위협에 그쳤을 뿐 필리버스터 규정변경은 ‘핵 옵션’이라고 불리며 양쪽 모두가 두려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민주당이 핵 발사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과연 핵폭탄이었을까, 그저 일반 폭탄에 그쳤을까…어쨌든 만만치 않을 후폭풍을 예상하며 휴가를 마치고 다음 주에 돌아와 ‘새로운 시대(new era)’에 들어설 상원의 연말을 워싱턴은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다.
상원의 변화가 가져올 장기적 영향은 아직 확실치 않다. 당장은 재닛 옐런 연준의장을 비롯해 국토안보부장관, 3명의 워싱턴DC 항소법원 판사 등 오랫동안 기다려온 수십명 지명자들의 인준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굴욕적으로’ 파워를 빼앗긴 공화당의 반발은 쉽게 가라앉을 리 없다. 아직 피리버스터가 건재한 일반법안 심의에서 더 거세게 제동을 걸 것이다. 예년 같으면 무사통과했을 국방지출안과 농업법안 등이 다음 한 두주 곤욕을 치를 수 있다. 타임지의 전망대로 정부폐쇄 때 여론비난을 감안하여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을 선택해 상원업무 마비까지는 치닫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이민개혁안 등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중도파의원들도 민주당과의 타협에 나서길 주저할 것이다.
양극화의 병폐가 너무 심해 발동시킨 ‘핵 옵션’이 당장은 더 심한 양극화를 부르고 있는 워싱턴의 12월, 연방의회엔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한 냉전의 연말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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