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이 자신의 셀폰까지 도청한 사실에 분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는 지난 주 손상된 신뢰회복을 위해선 양국 간 새로운 정보공유 방안이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새롭게? 어느 수준까지? “아마도 총리의 마음속에 떠오른 모델은 ‘다섯 개의 눈’이었을 것”이라고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가 독일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메르켈 도청을 둘러싼 논쟁을 더욱 가열시킨 것이 미국과 독일·프랑스 등 유럽국가 간의 정보공유에 대한 뿌리 깊은 갈등이었다면 ‘다섯 개의 눈’은 그 갈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눈(Five eyes)’은 미국이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4개 영어권 국가와 맺고 있는 정보공유협약이다. 첩보활동에도 자타가 공인하는 수퍼 파워인 미국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를 감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결속한 회원국들은 “서로를 감시할 필요 없는 가장 가까운 우방의 이너서클”로 간주된다. 지구촌 정보커뮤니티의 특권층인 셈이다.
2차 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의 긴밀한 정보제휴에서 잉태해 전쟁이 끝난 직후 태어난 ‘그들만의 클럽’이라고 BBC는 설명한다. 독일 및 일본의 암호해독에 집중하던 런던근교 정보센터 ‘블레츨리 파크’의 정보분석 작업을 통해 영국과 미국은 서로의 협조가 전 세계 통신감청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시작은 1946년 양국이 맺은 7페이지짜리 ‘영국-미국 통신’ 비밀협약이었다. 후에 ‘UKUSA’로 개명했고 1948년엔 캐나다가, 1956년엔 호주와 뉴질랜드가 합류하면서 가디언지의 표현에 의하면 ‘소수의 백인 영어권 국가’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클럽’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정보물마다 5개국의 약칭과 함께 ‘EYES ONLY(보기만 할 것)’라고 표기되면서 ‘파이브 아이즈’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이브 아이즈’의 존재는 회원국인 호주의 수상조차 1973년까지 몰랐을 정도로 비밀에 부쳐졌었다. 가끔씩 언론에 미확인 보도로 거론되다가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협약 문건이 2010년 기밀문서 리스트에서 해제되면서였다.
출범당시엔 소련과 동유럽 인공위성 감시에 집중했으나 지금은 사실상 모든 지역의 모든 정보를 커버한다. 적대국 뿐 아니라 ‘제3의 국가군(Third parties)’이라고 이름붙인 클럽 밖의 모든 동맹국들도 첩보의 대상이다.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우방이면서도 감시대상에선 제외되지 않는 ‘제3의 국가군‘엔 한국과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각국의 정상들만 감시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다섯 개의 눈’ 레이더 선상에 떠있으며 고인이 된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감시 대상이었다. 특히 97년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까지 도청 당했다는 다이애나에 대한 정보는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직 기밀해제가 되지 않아 공개는 안 된 상태다.
NSA의 전방위적 도청 의혹 파문이 계속 확대되면서 동맹국들은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워싱턴은 책임 공방과 대책 마련으로 시끌시끌 소란스럽다. 엊그제 사이 도청사태 처리를 위해 독일과 유럽의회 대표단이 워싱턴에 도착했으며 독일과 브라질이 앞장 선 유엔 결의안이 작성되고 있는 가하면 오바마 대통령과 미 연방의회도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다짐하고 있다.
효과적 대책을 마련하려면 정확한 원인부터 규명해야 한다 : 왜 우방의 정상들을 감시하는가? 전문가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다.
통제되지 않은 NSA의 과잉 역량과 과잉 파워 때문이라는 진보진영 일각의 비판과 “동맹국이 언제나 친구는 아니기 때문”이라는 정보 관련자들의 해명으로 둘 다 일리는 충분하다.
7,000만 건의 프랑스 내 통화가 도청 당했다는 보도에 격노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친구 사이에 감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했지만 이미 오래전 “국가에겐 친구란 없다.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라고 국제관계를 정의한 것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었다. 이번에 펄펄 뛰는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미국과 미국의 대통령을 도·감청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정보관계자들은 주장한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도 29일 하원청문회에서 “외국 지도자들에 대한 감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정보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동맹국에 대한 감시는 과거에도 언제나 행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행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국제 현실을 너무 잘 아는 강대국 정상들이 도청 자체에 충격을 표하며 문제를 삼는 것은 이번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기회주의’라고 평가절하한 로드리 제프리스-존스 에딘버러대 교수는 그러나 이런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폭로’의 충격은 또 다른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국가에 안겨준 굴욕감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경고다. 동맹국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정보 수집을 계속하는 ‘균형 잡기’가 미국첩보의 중대한 새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새 과제를 실현하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오랫동안 분개해 왔다는 그들만의 특별 정보 클럽 ‘다섯 개의 눈’도 굳게 닫아걸었던 철옹성 문을 이제는 열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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