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과 중종, 선대왕들의 능묘를 파헤친 범능적(犯陵賊)이 압송돼왔다. 사실에 있어 그들은 일본의 사형수로 조선 땅을 밟은 적도 없다. 조선 조정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자코 받아들이고 참형에 처했다. 그리고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것이 기유약조다. 그 해는 1609년으로 조선조 15대 왕인 광해군 원년이다. 임진(1592년)년과 정묘(1597년)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미증유의 피해를 입었다.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한 것이다.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다룬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사 드라마에서도 단골소재로 떠오른다. 광해군을 말하는 것이다.
쿠데타로 밀려난 왕, 연산군과 함께 조선조의 2대 폭군으로 단죄를 받았던 그가 역사의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명에서 청으로. 동아시아 파워 교체기에 탁월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격동기, 그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광해군에게 주로 쏟아지는 찬사로 폭군이기 보다는 당쟁의 희생자라는 것이 요즘의 평가다.
그 광해군의 외교능력과 관련해 별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 일본외교다.
왕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맞는다. 전쟁발발과 함께 세자로 책봉돼 분조(分朝)를 이끌고 본격적인 항전을 독려하는 활약을 펼친다. 그게 시발점이 돼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런 그가 전란 후 극심한 반일정서를 무릅쓰고 기유약조를 확정함으로써 조선조 후기 대일외교체제를 성립시킨 것이다. 왜 그렇게 서둘렀나.
최전선에서 겪은 참담한 전쟁경험이 바로 원인이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또 한 차례의 전쟁은 막아야 한다. 그런데 ‘남왜북로’로 상징되는 당시의 역학구도는 평화정착을 어렵게 한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외교 접근법을 찾아낸 것이다.
임진년과 정묘년의 과오를 인정한 일본은 포용한다. 과거는 일단 과거로 돌리고. 그리고 만주족의 내침 가능성에 총력을 기울인다. 외정의 기본 방향을 이렇게 잡은 것이다.
이와 함께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후금(뒤의 청나라)에 대한 첩보전이었다. 만주어에 능통한 역관들을 양성해 후금에 침투시키는 등 현대 첩보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치밀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군사적 대책이었다. 만주족 철기의 위력을 화포로 막는다는 방어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여기서 새삼 엿보이는 것이 광해군의 유연한 접근 책이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일본 무기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 일본무기 구입방안을 비밀리에 타진하기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 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당시 상황에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택한 것은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데 전념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광해군의 외교 목표는 무엇보다 ‘국가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 아니다. 벌써 3주가 지났나. 발리 APEC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총리가 만남을 가졌던 것이. 그 해후의 장면이 보통 어색한 것이 아니 어서다.
어색하고 싸늘한 그 때 그 장면의 사진이 지금도 계속 뉴스를 타고 있다. 이런 캡션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총리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의 어색한 ‘바디 랭귀지’는 두 나라 관계의 현주소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아베 총리를 대하는 박 대통령의 오연할 정도의 그 냉랭한 태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십분 이해가 간다. 잘못 된 과거사에 대한 회개를 모르는 일본. 그러면서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 그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한국인이기에.
하여튼 최악의 상황을 치닫고 있는 것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관계다. 그렇다고 이 정황에서 무대화가 능사일까. 더구나 외교란 결코 본심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게임이다. 그런데 외교의 수장이랄 수 있는 대통령이 국제외교무대에서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고 앉아 있다는 것이.
새삼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 ‘창조경제보다도 더 시급히 한국에 요청되는 것은 창조 외교’라는 한국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 학자의 주장이다.
“한국인의 대일본감정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일본이 외교적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대응방식만 찾는 그 굴레를 한국은 벗어날 때가 됐다.” 이런 지적과 함께 한국외교의 전환적 자세, 창의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더라도 그 사이에 사자는 항상 왕래하여야 한다.’ 광해군이 지녔던 외교적 신념이었다고 한다.
보다 유연한, 그리고 먼 훗날을 내다보는 창조적인 대일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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