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아침 저녁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와베란다 창끝에 걸린 둥근보름달과 처마 밑에서 밤새껏 우는 풀벌레 소리속에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을이 오면 지나간 시간과 그속에 빛 바랜 얼굴들과 추억들이 생각나고 못다한 사랑은 가슴 속에 아련한 미련으로 남는 것인가봅니다/
데니! 이제 추석도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닥아오니새삼 그동안 까마득히 잊었던 당신과의 추억이 생각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린 추억다운 추억도 만들지못하고 그냥 기약 없이 만나고 헤어진 그런 사이였지요. 데니! 이젠 오십년도 더지난 그날, 가을이 깊어진어느 오후였지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잡지사기자로 친구들과 더불어 사회사업이란 명목으로 어느병동으로 위문차 갔던 것이인연이 되어 우리들은 병원에서 몇번 만난게 고작이었지만, 그날 침대에 앉았던당신은 푸른 눈과 옅은 갈색 머리를 하고 나를 보자 ‘하이!’하며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용기를 내어 당신 앞으로 가서그때부터 손짓 발짓을 해가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때 나는 겨우 내 이름과 내가 기자라는 사실만을 말할 만큼 영어에 서툰사람이었지요.
데니! 그후 한달에 두어번 친구들과 워커힐 근처에있던 당신을 위문하며 난그때 당신이 황달병으로 그곳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고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였지요. 유타의 어느 시골이 고향인 당신은 집에서 수백마리 소나 양을 키우는, 내게는 처음 만난 서부의 목동이며 더욱 당신의이름이 데니여서 나도 모르게 아일랜드 민요에 나오는데니보이를 연상했습니다.
몇번의 만남이 있은 후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그눈이 하얗게 오던 날, 당신은 내게 값비싼 시계를 선물해서 나는 남편에게 크게오해를 받고 난처해 지기도했습니다. 사실 난 그때 결혼을 하고 한살바기 아기도있는 엄마였지만, 영어도 부족해서 나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무엇하고 또 하도 내가 젊어 보였는지 아마 당신은 나를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후 당신이 언제 한국을떠났는지 그것도 모른 채,나는 임신을 했기에 기자라는 직업도 잃고 그 당시 나는 일생 처음 닥친 극심한생활고를 겪으면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고 있었던때 였습니다. 내 남편은 어느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있었지만 말이 감독이지 매일펑펑 노는 룸펜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때 내게 온 당신의 한통의 편지는 나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다시 이역만리 태평양을 건넜고, 더욱 나를놀라게 한 것은 나와 결혼하기 위해 왔다는 당신의고백이었습니다. 이미 이사를 한 나를 찾기 위해 당신은 카투사를 대동하고 내가다니던 그 잡지사에 갔지만,그때 한 동료로부터 들은내 소식은 내가 결혼한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는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또 몇달이 흘렀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계속 편지를하는 당신을 만나야 했고,내 기막힌 상황을 얘기해야했습니다. 내가 주소를 더듬어 찾아간 곳은 의정부의한 미군부대였습니다. 하늘이 눈부시게 푸른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당신은 이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데니! 당신은 그 푸른 눈으로 나를 그윽히 바라보았습니다. 찻집에서 마주 앉았을때 당신의 첫마디가 "아유메어리?"였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푸른 눈에서 굵은 눈물이방울 방울 떨어졌습니다. 나는 할말을 잃었고, 미안해서 어쩔줄 몰랐습니다. 나는어떤 변명도 늘어놓을 만큼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어서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당신의 그런 감정에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함께 택시를 탔고 당신은 다시 부대로,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도중 당신은 갑자기 나를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다대고 뜨겁게 속삭였습니다.
"아이 러브유! 아이 러브 유!아이 러브 유!"라고.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얼마 후 또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군대를 연기했기 때문에 장교가 되려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을의끝자락에서 나무 잎사귀들은 온갖 색채로 바뀌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갑자기힘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스르르 주저 앉아 버리고말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번도 당신을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정작 당신이 이 땅을 떠난다고 들었을때 왜모든 것이 그토록 허무하고슬프고 쓸쓸해졌을까요?데니! 그후부터 데니보이의 노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애창곡이 되었지요. 당신은 지금도 유타의 어느시골에서 소와 양을 치는목동이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아니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겠지요. 진정한 사랑은미완성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요. 운전을 하며 프리웨이를 달리는데 섹스폰으로데니보이의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 당신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죽어 누워 있는 곳에서 나를 사랑한다는 당신의 소리를 들으며나는 평화스럽게 잠을 자겠지요. 그러면 내 무덤은 더따뜻해지겠지요/ 그 애잔한사랑의 고백이 오늘은 왜더 내 가슴을 파고 드는지알수 없습니다. 아마 가을이어서 그럴껍니다. 가을에 우리들은 만났고 또 영원히헤어졌으니까요.
데니! 이 노래가 있는한아마 나는 영원히 당신을기억하며 잠깐 왔다가 사라져간 그 풋풋했던 젊음을그리워 할 것입니다. 안녕히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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