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인터넷을 통해 본 뉴스여서인가. 그 시점은 무더위에 몸서리치던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지혜로 온다는 2013년 9월 초순께의 어느 날이다.
전두환, 이석기란 두 사람의 이름이 한국의 주요 신문 인터넷 지면을 가득 메웠다.
결국 백기투항을 하고 말았다.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뻗대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겨냥한 사정의 칼날에 추징금1672억을 모두 납부하겠다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전두환 뉴스는 그 날의 톱이 아니었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 것은 이석기 스토리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아니, 그 이전에 종북세력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그 이석기가 내란음모죄로 구속된 것이다.
2013년 여름의 시점에 나란히 신문지면의 톱 자리를 장식한 전두환과 이석기. 이는 우연인가. 아니면 뭔가 필연의 흐름인가. 새삼스레 질문을 던진 것은 다름 아니다.
10.26, 12.12, 그리고 5.18. 그 잇단 사태를 뒤로 한 전두환의 등장은 하나의 트라우마였다. 그 트라우마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괴물이 자라고 있었다. 80년대 한국의 대학가를 점령한 주사파 종북세력이다. 그 종북세력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 이석기는 달리 표현하면 전두환 시대의 산물로, 어두움에서 자란 그 시대의 사생아다.
그 이석기와 전두환, 80년대 좌와 우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던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단죄를 받는 운명에 몰려서다.
이제는 80대 할아버지다. 그렇지만 ‘감히 저자들이…’하는 여전히 뭔가 분노의 앙금 같은 것이 서려있는 듯하다. 회오(悔悟)의 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수모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낙향을 하겠다”는 과거의 영부인의 앙칼진 한탄에서는 오히려 오기마저 느껴진다.
민주투사, 아니 혁명열사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다. 자못 의기양양하다.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에 자신의 행동은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투의 발언에 행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면서. 마치 민주투사인 양 설쳐대는 그의 행태는 오연하기 보다는 뻔뻔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일말의 뉘우침도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의 행태와 관련해 문득 떠올려지는 경구(警句)다.
숱한 사람들이 민주화란 이름하에 희생됐다. 80년대의 아픔이다. 공간이 아닌 시간적 개념으로 접근해 볼 때 80년대로 가까이 갈수록 그 아픔은 예리하게 느껴진다. 말 그대로 비극적 상황이었다.
30여년, 한 세대의 세월이 지나갔다. 80년대의 아픔, 80년대의 외침은 이제는 아련히 느껴진다. 그런데 그 때 그 시절의 흘러간 외침을 반복한다. 자성의 노력도, 아픔도 없다. 마치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독점이나 한 듯이 자못 오연한 태도로.
여전히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다. 북한 김정은 체제가 하는 것은 모두 정의다. 때문에 6.25는 정의로운 민족해방운동이고, 한미동맹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3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종북세력의 주장이다. 특히 그 강령을 앵무새처럼 외듯 변함이 없는 이석기의 모습은 이제 와서 보면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2013년 여름의 시점에 불거진 이석기와 전두환 스토리. 과연 무엇을 말하나.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흐름, 그 스냅 사진의 한 장면이 아닐까.
극단의, 시대착오적인, ‘짝퉁’의 혁명논리- 그것이 극우든 극좌의 주장이든 간에-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시대 변화를 알리는 암묵의 시그널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혁명의 역사가 아니다. 항쟁의 역사다. 혁명이 지도부가 민중을 동원해 목적을 관철시키는 활동이라면 항쟁은 국민 대중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는 대중운동이다. 이 항쟁의 대중운동이 지향하는 것은 변증법적 변화가 아니다. 단계적 변화를 통한 민주화인 것이다.
이석기의 구속으로 그러면 종북주의자는 다 사라진 것인가.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다.
우파 성향 집필자들이 만든 역사교과서가 좌파 진영의 집중적 공격을 받고 있다. 거기에 정치권이 가세해 이념논쟁이 재연되고 교과서 편찬을 맡은 출판사는 온갖 협박에 시달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좌파의 공격이다. 그 공격에 대한 대항 논리는 물론이고 새 시대의 내러티브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한국의 우파다. 절박한 자기 이념이 없다. 그리고 여론에,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려만 드는 것이 한국의 보수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트라우마, 아니 종북 트라우마에서 대한민국은 언제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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