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연 반혁명 사건은 국가재건최고회의공보실장을 역임하고 육군 정훈학교 부교장을 하던 원충연 대령이 2군단 포병 사령관이던 박인도 대령과 함께 주동이 되어 5.16혁명세력을 제거하려던 사건이다.
5.16 이후 발표된 반혁명 사건 대부분은조작된 것이였지만 1965년의 원충연 사건만큼은 전투 병력 동원이 계획될 정도로 구체적인 쿠데타 음모였던 것이다. “박정희는혁명 공약대로 민정이양을 할 사람이 절대아니다.” 그래서 원충현 등은 존슨 대통령의초청으로 미국 순방길에 오르는 박정희 대통령을 납치한 다음 과도정부를 통해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군인은“ 군으로 복귀한다”는 계획이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이상열 중령이 방첩대에 제보함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제보자인 이상열 중령은 같은 포병의 선배이며 사건의 주모자 육사 7기 박인도 대령과는 사석에서 형님 아우 할 정도로 친한사이였다. 그리고 반혁명 거사에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이였던 인물이였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동지들의 거사 내용을 방첩부대장 윤필용 준장에게 밀고하고 자기만 살았다. 재판정에 이상열이 증인으로 나오자 피고인들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 “이놈 배신자야!”“개XX야” 하는 등 욕설을 퍼부어 공판장이소란해졌다고 한다.
이상열 중령은 이를 계기로 군부내에서는 배신자로 찍혀 왕따를 당했지만 사건을제보한 공로로 윤필용 방첩대장과는 가깝게되었다. 그리고 윤필용은 이상열을 김형욱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소개하여 정보부에특채 되도록 하였다. 이후 이상열은 김형욱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아 주로 해외 파트로돌며 정보부에서 승승장구하였다. 김형욱 정보부장이 1969년 해임된 다음에도 정보부내에서 이상열의 위치는 위축되지는 않았다.
김재규가 3사단 부사단장이였을 때는 이상열은 부관이였던 인연으로 이번에는 김재규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977년 프랑스 주재 대사관 공사로 임명된 이상열은1979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김재규의 지시를 받고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던 김형욱 납치암살을 현장 지휘하였다.
사건 당일 파리시내 리도 극장 인근으로 김형욱을 유인한 것도 이상열이였다.
이상열이 김형욱을 처치하면서 김재규에게 공을 세웠지만 김재규가 몰락하면서 다음에 택한 충성의 대상은 신흥 군부세력인전두환이다. 5공 6공에서 이상열은 미안마,리비아, 이란 대사를 역임하고 정부로부터는홍조근정훈장,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등을 받았다. 이렇게 사람들 보기에는 출세가도 만을 달리던 이상열은 그러나 마음의평안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보복을 할 것 같아서 나갈 때나 들아올때나 항상 두어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녔고, 꿈자리 역시 사나웠는지 어디 가다가도사찰만 보면 가서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은퇴후 이상열은 경기도 성남시에 자기 집이 있었으나 자기 집에서는 불안해서못살고 서울 근교 어디서 은둔하다가 2006년 4월 사망하였다.
한편 원충연 대령은 잡혀들어간 후 보안사 취조실에서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직전까지 갈 지경이되었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정도가 되면서 몸이 점점 식어가는 그 때 (내가 지금죽어가는구나) 죽음을 의식하면서 마지막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가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게된 것은 이미 각오한바이니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께서 제게 평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세상 일만 하다가 죽게된 것을 회개합니다.”그러면서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었는데 그 때 원 대령은신비한 체험을 했다.
천정에서 웬 밧줄이 내려오는데 “웬 밧줄일까?“ 하며 의하하게 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은 것이다.“ 이 줄을 잡아라”는 말이였다. 그 순간 고문으로 인하여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던 몸에 갑자기 힘이 솟아 벌떡 일어나 그 밧줄을 잡았다 (그의 옥중 회고록 “이 줄을 잡아라”에서). 그때 두 번째 음성이 들렸다. “ 다시는 이 줄을놓지 말찌니라.” 그 후 원충연의 삶이 바뀌었다. 두레마을의 김진홍 목사가 유신치하에서안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성직자 보다 더 경건하고 진지한 동료 죄수 원충연을만나 큰 은혜를 받았음을 간증한 바 있다.
사형에서 무기 징역으로, 무기징역에서 15년 징역으로 형량이 감해진 원 대령은 1981년 출감하였다. 그리고 출감후 여러 교회를두루 다니며 신앙간증을 하는 한편 범죄자선도를 위한 복지사업인 중생회를 조직 활동해오다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카나다로이민을 와서 2004년 12월 편안한 죽음을맞았다. 두 사람의 처세와 그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통해서 우리 인생을 바라본다. 한사람은 시세를 쫓아 부귀영달은 누렸으나인생 그 자체는 항상 외롭고 불안했다. 또다른 한 사람은 실패한 자여서 그 죄값으로고난과 핍박을 받았으나 그 것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역사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리고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이 두사람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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