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철 목사(뉴잉글랜드 교회협의회 사무국장)
보스턴과 뉴잉글랜드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한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보스턴 지역에서 약 15년 목회하는 가운데 교인들을 보면서 느꼈던 것도 ‘보스턴은 참 외로운 곳이구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한 민족이라도 각자 다른 곳에서 뿌리 뽑아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의 한구석에 심어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고작 몇 달, 길어야 몇 년 동안 보스턴을 단기간 체류하고 떠나다보니 머물러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외로움은 가중되고, 이제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에 이력이 나서 무덤덤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가족과 같은 친밀함을 경험케 함으로써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 목회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했다. 새로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의례했던 첫마디도 ‘손님이나 방문자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 교회 내 공동체 내 가정으로 삼으세요’라는 것이었다.
몇 달을 머무르든 아니면 10년 넘게 오래 있어도 함께 지낸 시간의 길이보다 질(quality)이 더 중요해서, 잠시 보스턴에서 함께 지냈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들도 만나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목사의 경우는 일반 교인들보다 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마음에 있는 고민과 어려움과 문제를 그 누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상대가 없다는 의미이다. 교인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필자의 경우도 옛 친구들은 한국에 있고, 부모 동기들도 타지에 살다보니 마음을 열 수 있는 동무가 무척 아쉽다. 사랑하는 아내는 이미 충분히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있기 때문에 열외이고...
그나마 감사한 것은 뉴잉글랜드 지역 목사님들의 관계가 부드럽고 서로를 위해주는 분위기여서 자주 위로와 격려를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컬하게 보스턴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라고나 할까?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라면 기대할 수 없는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뉴잉글랜드 지역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경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큰 지역에서는 자기 교단을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에 타교단에 대하여는 무심한 편인데, 보스턴은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그리스도교, 나사렛, 장로교 할 것 없이 교단을 초월하여 친밀하게 모이고 연합 사업도 퍽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가곡 중에 ‘동무생각’(사우, 이은상 시, 박태준 곡)이라는 동요조의 노래가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인데 문득 궁금해졌다. 청라 언덕은 어디이고,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들어 준다는 동무는 누구일까? 사실 이 곡은 동무를 생각한다기보다 짝사랑하던 여자 친구를 향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배경인즉슨 대구 출신인 작곡가 박태준 선생은 계성고등학생 시절, 이웃 경북여고에 다니던 한 여학생을 사모하였었고, 그 후 마산으로 내려가 음악선생으로 일하면서도 그 여인을 못내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끙끙 속앓이만 하고 있는 동료 교사를 보다 못한 이은상 국어선생께서는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를 써 친구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고, 박태준 선생은 거기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곡 ‘동무생각’의 탄생이었다.
청라 언덕은 박태준 선생이 학생 때 살던 곳의 지명이고, 백합꽃은 경북여고의 교화(학교꽃)라고 한다. 원래 청라 언덕은 조선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살던 곳이었고, 지금 선교박물관이 된 그 집들을 푸르른 담쟁이(청라)들이 아름답게 덮고 있다. 필자에게 기회가 온다면 고국방문 때 꼭 한번 대구 청라언덕을 들러보리라!
동무란 청라 언덕과 같은 우리네 마음에 백합같이 피어나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귀한 존재이다. 친구란 저녁 조수와 같은 우리네 마음에 흰 새같이 떠돌아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또 밤의 장안과 같은 우리네 마음에 가등같이 빛나서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복된 선물이 바로 친구이다.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동무,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어느 분이 유튜브 ‘동무생각’의 한 동영상 끝부분에 성경의 요한복음 15장 15절을 붙여 넣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온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 사람들의 동무가 되어주기 위함이었다는 메시지였다.
그렇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 인정은커녕 손가락질과 정죄를 받던 사람들, 더럽다고 외면을 당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친구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다면, 백년지기 아니 영원지기 친구를 예수 안에서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한 찬송가 가사도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죄와 슬픔 맡은 우리 예수 어찌 좋은 친구인지!)라고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살기 때문에 여전히 외로운 분들이 있는가? 멀리 고국에 있는 친구만 생각하지 말고, 가까이 보스턴에 있는 꽤 괜찮은 친구들을 한번 사귀어 보시라! 떠나보낼 때는 시원섭섭히 떠나보내더라도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좋은 친구들을 이 뉴잉글랜드 땅에 사는 동안에 한번 만들어 보시라! 그래도 모든 슬픔을 사라지게 만들 친구가 생각나지 않거든, 외로운 사람들에게 참 좋은 친구로 찾아와 자기 목숨까지 내려놓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정말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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