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 상태이던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17)을 지난해 2월 플로리다주에서 총격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히스패닉계 백인 조지 짐머만(29)이 지난 13일 배심원 재판(이하 배심제)에서 무죄로 풀려나면서 미국사회가 들끊고 있다.
특히 흑인 사회는 이번 무죄평결을 1992년 ‘4·29 폭동’의 시발점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과 비유하면서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간 갈등 문제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1년 3월 LA에서 흑인 청년 킹을 무차별 구타한 백인 경관 4명이 이듬해 1992년 4월 29일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자 분노한 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폭동으로 꼽히는 4·29 폭동의 시발점이 됐다.
기자는 지난 6월17일부터 7월12일까지 4주 동안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의 배심원으로 선정돼 살인과 마약 혐의의 형사사건을 다를 수 있는 경험을 가졌다.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미국 사법제도에서는 법조인이 아닌 일반 시민이 재판이나 기소과정에 참여하여 유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제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활성화돼 있다.
피고에게는 다양한 삶의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무엇보다도 ‘9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을 이유로 시작됐고 존속되고 있는 배심제이지만 완벽하지도 않고 악용될 소지와 오판이 나올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 또한 존재하는 것이 배심제이기도 하다. 기자가 직접 참여하면서 느낀 점도 배심원의 평결이 자칫 인간의 감정과 감성에 치우치기도 하고 그야말로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유죄평결이 나오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공정한 처벌을 통한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자가 담당한 재판은 2012년 4월 사우스 센트럴에서 악명 높은 ‘크립스’ 계파의 흑인 갱 단원(33)이 길을 걸어가던 무고한 20대 후반의 흑인 남자를 라이벌 갱단 ‘블러드’로 오인해 드라이브바이 총격 살해를 저지른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한 달 여 만에 체포된 피고는 1급살인 및 마리화나 소지 및 판매 혐의 등 2가지 혐의로 기소됐었다.
재판에서 살인에 사용됐던 권총이나 지문, 유전자 등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당시 감시 카메라에 피고가 차량을 운전하고 도주하는 모습과 함께 피고를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주민 2명의 증인, 또 감옥 내 비밀 녹화를 통해 범죄를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음성 등 여러 정황적인 증거들이 제출됐지만 우리 배심원단은 3번의 표결에도 불구하고 끝내 만장일치 평결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반면 마약 혐의에 대해서는 만장일치 유죄 평결을 내릴 수 있었다.
최종 표결에서 배심원 12명중 10명이 피고를 범인이라고 표결했지만 2명의 히스패닉 여성 배심원이 끝내 무죄 표결을 하면서 살인혐의에 대해서는 ‘무효심리’가 됐다. 만약 피고가 ‘범인’이었다며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게 됐다는 점에서 기자를 포함해 유죄라고 표결한 10명 배심원들은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물론 검찰이 재기소를 할 수 있지만 배심원 무효심리가 난 사건에서 검찰이 재기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 법조계에서 형사재판에서 배심제를 선택하지 않는 피고는 ‘바보’라는 애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 배심제를 둘러 싼 가장 큰 비평은 똑같은 증거를 가지고도 어느 지역 법원에서 재판이 열리고 또 배심원의 인종구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피고와 같은 인종이 배심원으로 선정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로 기자가 참여한 재판의 경우 50명 배심원 후보 중 최종 선정된 12명 후보 중 흑인은 한 명도 없었고 히스패닉 6명, 아시안 4명, 백인 2명으로 구성됐다. 성별로는 남성 8명, 여성 4명이었다. 50명 후보 중 흑인이 4명 정도 있었지만 선정 과정에서 검사 측에 의해 제외됐다. 짐머만 재판의 경우에도 후보 40명중 흑인 7명이 있었지만 모두 제외됐고 6명 배심원은 모두 여성, 또 백인 5명과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됐다.
미국 배심제에서는 배심원 중 한명이라도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거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의존해 표결을 해도 이를 걸러낼 기능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조계는 배심제에서 배심원이 원고나 피고 측에 매수되거나 협박을 받아 평결을 내리거나, 증거를 무시하고 동정심이나 감정, 감성을 토대로 잘못된 평결을 내릴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판사도 재판을 시작하기 전 배심원들에게 “개인의 편견이나 감정, 감성을 모두 버리고 오직 법원에 제출된 증거만을 토대로 공정한 평결을 내려야 한다”고 명령했지만 배심원 모두가 이같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론은 신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이 내리는 결정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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