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동행했던 길벗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하는 먼 길로 먼저 떠나 보내고 늦은 밤 외진 마을 역사(정거장)의 희미한 촉광의 가로등 밑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그가 타고 갈 막차를 기다리는 한 늙은이! 그는 쌍꺼풀이 처진 눈을 지긋이 감고, 그의 생애에서 못다 이룬 일들에 대한 아쉬움을 인생극장의 삼류배우 처럼 독백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계획했다가 거의 성사 단계에서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낚시꾼의 세계에서 흔히 쓰는 말 ‘놓쳐버린 가오리 멍석만 했다!’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그 노인(바로 나 자신)이 회상하고 있는 지난 날 내가 세웠던 계획이 성사되었더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의 시도였기에 나는 이루지 못한 그 일을, 놓친 가오리 만큼이나 아쉽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그 일들의 몇 가지를 회상해 본다. 그 첫째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세월의 저편인 1963년, 내가 창단한 아동극단 ‘새들’의 제1차 일본 순회공연 때 내가 찾아간 도쿄 근교의 교육도시인 세다가야 구(區)에 자리 잡고 있는 예능(예술)교육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초·중·고·대학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다마가와학원과 세이죠학원!
특히 아동극을 정과로 다루고 있는 세이죠학원 초등부는 일본 아동극의 대부로 불리워지고 있는 사이다 다까시(내 아동극 작가수업에 크게 영향을 미친 분) 선생이 재직한 학교로서, 오늘 날 일본의 학교극의 메카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단 하루의 견학이기는 했지만 이 학교의 한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극화학습(교과서 단원을 연극 극본으로 꾸며 수업하는 수업방법)을 눈여겨 보고는 오다큐 선 전철에 몸을 담고 도쿄 시내로 돌아 오면서 귀국하면 나도 세이죠학원 초등부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를 꼭 세워야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초의 공연 예상 기일을 훌쩍 넘긴 10개 도시 53일이란 긴 공연을 끝내고 귀국과 동시에 찾아 간 곳이 남대문로(路)에 있는 서울시 경찰국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경남여자고등공민학교였다. 내가 그 학교를 찾아간 이유는, 평소부터 시청각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정해영 교장과 시청각교육 신문사 편집장 시절부터 특별한 친분이 있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정 교장을 만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보고 온 세이죠 초등학교의 아동극을 정과로 다루는 교육방법을 설명하고, 우리 둘이 힘을 모아 세이죠학원 같은 사립초등학교를 세운 후에, 서울 근교의 김포 가두의 넓은 부지를 확보하여 차차 중·고등부로 영역을 넓힌 다음, 예술대학까지 세우면 도쿄 근교의 세다가야 구 같은 교육도시가 형성 될 수 있을 것이란 내 나름의 확신에 찬 구상을 늘어 놓았다. 그러자 정교장의 반응이 의외로 긍정적으로 반영돼 왔다.
그리하여 우리 둘은 곧 바로 이 일의 추진에 발벗고 나섰다. 우리는 학생 모집에 앞서 필요한 교실 확보와 그 다음 과정으로 사립초등학교 설립을 위한 설립인가 주무 관청인 서울시 교육청과의 사전타진을 위해 교육청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용케도 우리가 첫 단계로 찾아나선 빈 교실이 종로구 산자락의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 인근의 폐교한 교실 14개를 찾아 내었고, 학교설립인가 문제도 시교육청 당국으로부터 희망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그 까닭은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의 인구 팽창으로 인해 2부 내지 3부 수업을 하는 콩나물시루 교실현상인 시기었기에 우리가 앞으로 금싸라기 같은 남대문 시장 입구의 학교 부지와 학교를 매각하여 서울 외곽지대로 학교를 옮긴다는 우리의 계획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육청 당국자들이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내가 수년간 교육관계 신문 기자생활을 하면서 그들 당국자들과 쌓은 인간적인 친분 또한 힘이 되었던게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큰 기대를 가슴에 품고 빈 교실 매매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빈 교실 매매 계약 날짜를 불과 10일 앞둔 시점에서 호사다마란 말 그대로 청천벽락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소식이란 다름 아닌 정교장 학교의 설립자이자, 그 학교의 이사장인 정교장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큰 광산에서 낙반사고로 5명의 광부가 매몰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돌발사고로 우리들의 계획은 한여름밤의 백일몽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교장과 나의 예능교육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사립초등학교 설립의 부푼 꿈이 유리조각 같이 산산이 깨어진지 2년이 채 못된 시점에서 서울에서의 경희대학 부설의 사립초등학교와 리라, 그리고 은석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고, 연이어 부산에서는 남성여고 부설 초등학교가 문을 여는 등, 사립초등학교가 줄을 이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이 나의 아이디어가 영향력이 미친 결과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던 이러한 현상을 지켜 보면서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기로’ 아쉬움과 허탈에 빠져,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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