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굽는 독일 이민자 유산 자리한 젊은 문화의 메카
1960년대 후반부터 특유의 카운터컬처.아이덴티티 인정받아 독자적 발전상 그려
제이콥 애스터 유산으로 대규모 도서관.극장 등 건설 ‘애스터 플레이스’라 불려
뉴욕시서 처음 문 연 무료 도서관 ‘애스터 도서관’은 뉴욕공공도서관의 전신
‘쿠퍼 유니언’ 인종.종교.사회적 지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학교 지향
■제이콥 애스터의 유산이 남겨진 곳
NYU와 관련된 기념품이나 의류, 그리고 각종 서적을 파는 숍을 끼고 돌자, 차와 사람이 어지러이 오가는 교차로와 만나게 된다. 8번가와 라파에트 스트릿이 만나는 지역. 원래 이 일대는 로어 이스트사이드의 일부로 간주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특유의 카운터컬처와 아이덴티티를 인정받아 독자적인 발전상을 그려왔다.
정육면체가 기울어져 있는 토니 로젠탈의 조각 ‘애스터 큐브(Alamo)’를 중심으로 차와 사람이 뒤섞인다. 옆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이들에 더해, 커피 한 잔을 든 채 바삐 움직이는 비즈니스맨도 보인다. 또 커다란 악기를 들고 거리를 서성이는 한 무리의 아티스트 역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옆에서 사진 찍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까지 하나의 화면 속에 전부 다 들어온다.
사실 이 일대가 애스터 플레이스(Astor Place)라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100여 년 전 ‘뉴욕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존 제이콥 애스터의 유산에 의해, 이곳에 대규모 도서관을 비롯해 오페라 하우스, 극장 등이 건설된 데서 연유한다.
특히 ‘시에서 처음 문을 연 무료 도서관’ 애스터 도서관은 현재 뉴욕공공도서관의 전신이기에 그 의미가 더하다. 그는 1784년 독일에서 이민 와 빵 굽는 기사로 자립한 노동자였다. 이후 모피 무역에 눈을 떠 사업을 확장시킨 뒤 미국에서 모피 무역에 관한 독점권으로 큰돈을 거머쥔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도 남들보다 한 발 앞섰고, 맨해튼의 부동산 사업에도 일찍이 진출해 미국 최고의 거부로 불렀다.
■초창기 독일계들의 거주로 출발한 역사
다른 초창기 거부들처럼 그의 사업 방식 역시 악명 높았다. 싼 토지를 매점매석해 가치가 오를 때까지 팔지 않았다. 그 과정에 무지한 이들을 속여 토지를 강탈하거나, 법의 구멍을 악용해 악랄한 비즈니스 수법으로 지역민들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그는 로어 이스트사이드의 테너먼트를 다수 사들여, 가난한 이들을 상대로 임대업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 고장 난 시설물에 수리조차 해주지 않는 방침을 내세워 일대의 생활환경 악화를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랬던 그가 인생 말년에는 다양한 자선 사업을 펼치는 자선가로 거듭났다. 이 때 그가 남긴 유산들이 애스터 플레이스 곳곳에 자리해 눈길을 끈다. 애스터 오페라 하우스(현 클린튼 홀)를 비롯해 애스터 플레이스 빌딩, 애스터 도서관, 애스터 플레이스 시어터 등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 애스터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초기 독일계 이민자들이 대거 거주했다. 가난한 노동자로 건너와 신대륙에서 발명의 재능을 꽃 피운 피터 쿠퍼 역시 그 한 명이었다. 1829년 미국 최초의 증기 기관차를 독학으로 만든 그는, 정치와 사회 개혁에도 관심이 많던 열혈 청년이었다.
애스터 플레이스에서 일식 주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세인트막스 플레이스 쪽으로 걷다 보면, 거대한 화강암 건물이 눈에 띈다. 이름하여 쿠퍼유니언(Cooper Union). 이곳은 노동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결집시켜 1859년 완성한 학교로, 어느 의미 미국의 자유·평등 교육의 화신이라 평가할만한 성과물이다. 인종, 종교,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학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방침에 따라 현재도 학비는 무료이며, 특히 건축,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교육 커리큘럼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있다.
■ 링컨 쿠퍼유니언 연설...노예해방운동 촉발
쿠퍼유니언이 주목받은 데는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1860년 2월 27일, 교내 그레이트 홀에서 대통령을 꿈꾸던 한 명의 정치인이 펼친 연설이 큰 역할을 다했다. 훗날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불린 애브라함 링컨이 1,500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노예제 반대 연설을 남긴 것이다. 사람들에게 ‘쿠퍼유니언 연설’로 불린 이 일을 계기로 역사적인 ‘노예해방운동’이 촉발되었다. 당시 51세로 처음이자 마지막 뉴욕 방문을 다한 그는 2개월 뒤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수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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