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한국시간) 서울 프레스센터. 정치 종교 시민사회 등 각 분야에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인사 66명이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 구조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이를 위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선언문’을 발표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줄다리기 등 국제관계 또한 심상찮은 가운데 나온 이 선언문은 평화체제 전환, 한반도 비핵화, 남북 민간교류 및 대북 인도적 지원 재개 등 남북관계의 6대 기본원칙을 담았다. 이것이 나올 수 있도록 무진 말품 발품을 판 이가 정토회 지도법사 겸 평화재단 이사장 법륜스님이다. 20일 오전. 수행팀에 따르면은 법륜스님은 2차례(8시, 10시) 모임을 가졌다.
10시 모임이 길어졌다. 인천공항행 차안에서 국수로 허기를 달랬다. 공항서도 ‘일’은 계속됐다. 국민통합 선언문 홍보대책 점검. 오후 3시15분, LA행 비행기 탑승. 도착당일(20일, 이하 미서부시간) 저녁, LA 홀리데이 인 부에나 팍에서 강연. 21일 북가주행. 지인과 늦은 점심을 함께하며 상담. UC버클리로 이동. 저녁 7시부터 9시45분까지 수타자 다이홀 바나타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희망세상 만들기 즉문즉설’까지 하루남짓 그의 행적은 이랬다. 꽉 째인 스케줄은 뒤로도 마찬가지. 행사장 인근에서 야참 겸 저녁. 이튿날(22일) 시애틀로 이동해 또 즉문즉설, 그 이튿날(23일)에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다시 한번. 24일과 25일, 밴쿠버에서 열린 제14회 세계한민족포럼 참가. 26일,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UC버클리한인대학원학생회(회장 우승민/원자력핵공학 박사과정)와 샌프란시스코정토회(총무 허성호/IT전문가)가 공동으로 주관한 UC버클리 즉문즉설에는 200여명이 함께했다. 정토회원들은 물론이고 원만화 보살(자비봉사회 회장) 등 불자들, 종교초월 공동체 어울림에 모범을 보여온 원불교SF교당 윤선중 교무 등이 속속 모습을 보였다.
주부 배경애씨는 친구와 함께 멀리 타호에서 달려와 일찌감치 앞자리에 터잡았다. 스님의 사회적/정치적 위상(혹은 입장) 때문인지 더러 ‘왕년의 민주투사’도 열린 대화의 장을 찾았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대학생 등 젊은층이 많았다. 영상물 상영과 사회자 인사에 이어 7시6분, 스님이 연단에 올랐다.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나의 고민 우리의 숙제를 대번에 풀어줄 ‘쌈빡한 답’을 기대하는 박수요, 그동안 그래온(그래왔다고 믿는) 데서 나온 환호성이었을 게다. 스님은 ‘즉문’을 받기에 앞서 ‘즉답’에 대한 기대나 믿음부터 깼다. 즉문즉답(答’)이 아니라 ‘즉문즉설(說)’로 된 이름표의 속풀이였다.
“(즉문즉설은) 평소 궁금해하거나 답답한 것이 있으면 그걸 갖고 여러분과 제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지식에는 답이 있으나 결혼해야 되느냐 이혼해야 되느냐 유학생활을 계속해야 되느냐 이런 것들은 답이 없다. 인생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만 있다.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돈이 궁할 때 돈을 빌리느냐 마느냐, 남산에 오르느냐 설악산에 오르느냐를 놓고 선택에 따른 책임(과보)의 다름-틀림이 아닌-을 예로 들었다.
“(돈을) 빌리면 지금은 좋지만 나중에 갚아야 하고 안빌리면 나중에 갚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 곤궁한 것이다…(남산 설악산도) 어느 산에 오르는 게 좋은가 이게 아니다. 남산은 시간도 짧고 슬리퍼 신고 도시락도 업이 올라갈 수 있지만 온갖 산천 넓은 바다를 볼 수 없고, 설악산은…. 그런데 슬리퍼 신고 설악산을 오르겠다고 한다면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된다. ”답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답을 깨우쳐가는 “지혜가 열리도록 도와주는 그것이 설법”이라는 말로 즉문즉설의 참뜻을 다시금 일러준 뒤 첫 즉문이 나왔다. 공부가 본분인 줄 알지만 가끔 “공부만?” 하는 회의에 빠지는 듯한 유학생의 즉문에 스님은 예의 남산/설악산 논법으로 본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면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세속적 판박이 규정에 얽매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실패도 공부요 좀 길게 보면 성공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한 스님은 “재앙이 복인 줄 깨닫는다면 인생의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즉설했다.
그 과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는 구절을 떠올려 “죽음 앞에서도 그 영혼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라는 해석, 79년과 83년 소위 ‘당국’에 걸려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할 때 ‘어떤 것’에 눈을 뜨게 된 사연 등을 나눴다. 실연과 이별의 고통을 녹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명작으로 탄생시킨 괴테의 예도 들었다. 각본없는 즉문즉설이다보니 자주 그렇듯이 아연 판이 튀는 듯한 즉문이 나왔다. 중년남자로부터였다. 북한의 김씨일가 3대세습과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의 딸 대통령 당선”을 싸잡아 비판하며 스님의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동의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스님은 판을 더 넓혔다. 유사이래 5천년동안 단 한번도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지도자를 선출해본 적이 없는 북한의 현실을 우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세습정권타도에 수반되는 혼란이 북한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혜택을 줄 것인가, 제3의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될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중국의 밀당(남북갈라먹기) 상황에서 북한의 현 지도부를 궁지로 몰았을 때 어떤 일(친중세력 쿠데타 등)이 벌어질 것이며 그것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등등을 헤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개탄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생과정을 예로 들어 장인의 좌익경력 때문에 그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연좌제적 발상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뒤, (박 당선 개탄보다) 중도세력을 포용하지 못한 야권의 실패를 반성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어진 즉문들은 이성문제 자녀문제 부부문제 등 다시 일상사의 범주로 돌아왔다. 심지어 최근 교통위반 벌금으로 400여달러를 내고 속이 쓰린 학생으로부터 위로를 부탁하는 즉문을 받자 스님은 “그거 좀 싸다, 한 천불 내야 담부터 정신을 더 차릴텐데”라며 “큰 사고 나서 죽을 위험을 막아준 것으로 감사히 받아들이라”고 다독였다.
대화마당은 당초 예정을 넘겨 9시45분에야 걷혔다. 끝나기 몇분 전에 즉문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가 기회를 못잡은 이들만 너댓이었다. 이들 표정도 다들 환했다. 그냥 가기 아쉬운 듯 현관에서 복도에서 웅성웅성 여분의 감동을 나누는 이들에게, 스님의 책에 사인을 받으려고 줄지어 선 이들에게, 정토회 분홍셔츠를 입고 안내를 맡은 UC버클리 학생들은 푯말인사를 건넸다. “9월5일에 다시 만납시다.” 매년 가을 열리는 법륜스님의 희망공감 즉문즉설 북미주 순회는 오는 9월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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