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의 도청행위가 전국적 조명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에도 부시대통령의 허용 하에 미국민의 국제통화 내용을 4년간 도청해온 NSA의 ‘테러리스트 감시작전’이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폭로되면서 뜨거운 논쟁을 불렀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이후 공권력의 도청 남용방지를 위해 제정된 해외정보감시법에 의해 도청 영장을 쉽게 내주는 특별법원이 있는데도 그것마저 생략한 채 부시행정부는 ‘영장없는 도청’을 강행했었다.
쟁점은 그때도 도청 자체가 아니었다. 아무도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고 테러전쟁에서 도청이 상당히 효과적 무기일 수 있다는 점도 시인했다. 그러나 찬반 진영은 당에 따라 갈렸었다. 여당 공화당은 전시의 대통령 권한을 내세우며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 방지가 우선이라고 강조했고 야당 민주당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불법적 민권자유 침해는 지양하라고 아우성 쳤다.
관련논쟁이 계속되던 2007년, 대선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부시행정부가 “우리에게 귀중한 자유와 우리에게 필요한 안보 중 하나를 고르라는 그릇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공약으로 ‘투명한 정부’를 강조했었다. 안보와 자유가 반드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안보는 지켜질 수 있다…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지난 주 가디언과 워싱턴포스트의 잇단 보도로 폭로된 NSA의 대규모 감시실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정부의 정보기관이 전화회사 버라이즌을 통해 수백만명 개인의 통화기록을 비밀리에 수집하는 한편, 구글을 비롯한 9개 인터넷회사의 중앙서버에 접속하여 동영상에서 이메일까지 온라인 활동을 추적하며 개인정보를 무차별·무제한으로, 당사자는 전혀 모르게 수집해왔다는 것이다.
NSA에게 넘겨졌을 ‘나의 정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 “미국인들이 누구에게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전화하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각 개인에 대한 극히 사적인 정보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데이터를 이용하여 정부는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신념에 대해 - 정치적 성향과 유대관계에서 건강상태, 성적 취향, 종교, 혼외정사에 이르기까지 - 내밀한 세부사항을 알아낼 수 있다. 조지워싱턴 법대 프라이버시 전문 대니얼 솔로브 교수는 정보기관의 감시체제를 점묘화의 대가인 조르주 쇠라의 작품에 비유한다. 한 개의 점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많은 점이 모이면 하나의 초상화가 완성되는 것처럼…”상식적으론 용납하기 힘든 사생활 침해이지만 NSA의 감시활동은 법적으로는 하자 없는 합법 행위다. 엊그제 미시민자유연맹(ACLU)이 위헌소송을 제기했지만 승소확률은 낮다. 부시시절 ‘영장없는 도청’을 상대로도 70여건의 위헌소송이 제기되었지만 거의 전부 기각 당했다. 새삼 놀랄 것도 아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한 달 만에 분노와 공포로 불 지펴진 애국심으로 국민과 한 마음이 된 의회가 무제한에 가까운 정보당국의 수사권을 허용한 ‘애국법’을 통과시켰을 때 이미 예견했어야 한 일이다.
테러에 대한 미국민의 여론은 9.11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사생활 보호보다는 테러방지에 우선권을 준다. 56%가 테러방지에 도움 된다면 대규모 통화기록 추적도 수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폴리티코의 지적처럼 미국민의 안보에 대한 반응은 양면적이다. 마치 ‘적자’ 이슈와 비슷하다. 늘어나는 적자를 걱정하면서 정부지출 감축을 지지하지만 정작 적자의 요인인 사회보장프로 삭감엔 반대하듯이, 테러를 우려하며 통화기록 비밀 수집은 참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나는 온라인 추적엔 과반수가 반대한다.
게다가 이제 감시체제 논쟁은 더 이상과 ‘안보 대 자유’만의 이슈가 아니다. 테크놀로지 발달이라는 새로운 요인이 가세했다. 정부의 감시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세상은 더 이상 프라이버시를 허용하지 않는다. 보안기술 전문가 브루스 슈나이더는 “인터넷은 이미 하나의 감시국가”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좋든 싫든, 우리는 늘 누구에겐가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기자가 ‘콜루전’이라는 추가기능을 사용해 누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지 추적해 보았더니 36시간동안 105개의 회사가 그의 인터넷 사용을 추적하고 있었다고 슈나이더는 전한다.
인터넷은 이제 삶의 필수요소가 되었고 인터넷에선 CIA국장의 프라이버시도 보장되지 않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각된 ‘정부의 감시체제’를 둘러싼 논쟁은 더 이상 당파적 이슈가 아니라는 전 백악관 보좌관 반 존스의 지적은 요즘 워싱턴에서 증명되고 있다. 민주당에선 민권수호 리버럴과 오바마 실용주의자들이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공화당에선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안보 매파에 도전하며 사생활 보호를 외치고 있다. 당내 교통정리가 필요할 지경이다.
감시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영웅인지, 범죄자인지는 아직 결론짓기 힘들지만 그가 진지한 논쟁에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의회도 이미 관련청문회를 시작했으니 조만간 감시실태는 보다 정확해 질 것이다. 실태가 공개되면 시스템의 명암도 드러날 것이고 기존 관련법을 수정하든, 폐기하고 새 법을 만들든 정부의 무제한 파워를 통제할 남용방지 장치도 마련될 것이다. 백악관과 의회지도부가 얼마나 진지하게 다룰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지난 주 NSA의 감시실태를 적극 두둔한 오바마 대통령의 첫 반응이 상원의원 시절과 달라진 것은 당연하다 : “전혀 불편함 없이 100%의 안보와 100%의 프라이버시를 누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한다. 우리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 것이다”그 적절한 균형이 어디쯤인가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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