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용평론, 활동자료집 1968~2013’출간, 이병임 미주예총 회장
▶ 평론·칼럼·인터뷰·공연 자료 700여 페이지 수록‘한정판 5권’“비화 담은 회고록 조만간 낼 것"
한국 최초의 무용평론가로서 활동해 온 자신의 50년 자료집을 한정 출판해 한국과 미국의 문화예술기관에 기증한 이병임 회장.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여류 무용평론가, 지난 45년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한미 양국의 한인무용계를 주무르며 막강한 힘을 행사해 온‘영원한 현역’ 이병임 미주예총 회장 말이다.
그가 지난달 23일 LA 한국문화원에 전달한‘이병임 무용평론, 활동자료집 1968~2013’은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만큼 엄청나게 두껍고 무거운 책이다. 거기엔 그가 1968년부터 2013년까지 쓴 평론, 시론, 인터뷰, 칼럼, 주관 이벤트 목록, 관련기사, 초청했던 무용가 및 공연단체 등의 자료가 700여페이지에 걸쳐 수많은 사진과 함께 빼곡히 수록돼 있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자료를 보존해 온 정성도 놀랍지만, 어쩌면 개인의 것으로 사라지고 말 자료들을 자비 들여 책으로 엮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한 의지도 존경스럽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한국 무용의 역사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었던들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는 이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예술정보관에서 ‘우리 무용가의 미주지역 활동전: 무용평론가 이병임 편’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문화예술위가 기획한 ‘예술과 기록’ 시리즈의 하나로서 해외공연 예술인으로는 이 회장이 처음 초대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이 회장은 스크랩북 10권에 달하는 이 자료들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예술자료원에 기증하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예술자료원 측에서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서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자 사진작업을 시작한 것이 방대해지면서 책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7개월 걸려 제작한 책은 무려 1만7,500달러를 들여 한정판 5권만 출판했다.
그 중 한 권을 지난 5월6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예술자료원에 기증했고, 이어 모교인 이화여자대학 도서관과 무용가 육완순(개인으로 가장 많이 등장했기 때문)에게 전달한데 이어 LA 한국문화원에 한 권, 그리고 마지막 것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책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니 ‘더 무서운 것’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건 순 자료만 편집한 것이죠. 부지런히 스크랩북에 붙인 것만 남았고 빠진 것도 많아요. 사실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회고록을 낼 계획입니다. 아직은 사회인으로 얽혀 있어 걸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힘들지만 좀 더 나이 먹어 80세가 되면 회고록을 출판하려고 해요. 아마 나오면 무용계가 떠들썩할 테지만 그땐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내 회고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답니다”그가 입을 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도 많겠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무용계, 언론계, 학계, 정치계 인사들, 주로 남자들이 모두 좌불안석이지 않을까.
이병임은 어린 시절부터 무용이 좋아 동네 무용연구소를 기웃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대 무용과에 진학했다. 한국 무용을 전공한 그는 어느 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공연 연습을 참관하러 온 학장이 가운데 선 그를 보고 “쟤 못 생겼으니 자리 바꾸라”고 했던 것. 그때 처음으로 “아, 나는 인물이 안 되는구나”하는 충격으로 좌절했다는 그는 이어 결혼과 이혼의 시련을 겪고, 나중에는 관절에 문제가 생겨 춤추는 게 불가능해지자 평론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엔 무용 전문지가 없어서 종합 일간지에 무용 평을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인데 신문사의 문화부장들이 내 평을 다 받아줘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평을 썼어요. 젊은 혈기로 휘둘렀던 필봉의 힘 때문에 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고, 비평문화에 익숙하지 않던 당시 무용계가 들고 일어나자 무용협회와 법정시비 사건까지 벌이게 됐지요”74년 그가 무용협회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냈던 전대미문의 사건에 대해 그는 “바위에 깔렸다가 살아난 일”이라고 회상한다. 젊은 여성 평론가 한 명과 거대한 무용협회가 싸우는 이 사건을 신문마다 떠들어대자 정보부에까지 끌려갔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장될 수도 있었는데 바로 그때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하는 바람에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론에 따라 한 국회의원의 중재로 무용협회와 화해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못했다고 평을 쓰면 투서 들어오고, 잘 했다고 칭찬하면 반대파에서 투서하는, 그 사이에서 헤매는 게 평론가”라고 쓴 웃음을 짓는 그는 “여자로선 처음이고, 당시로선 처음이어서 더 시끄러웠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79년 미국으로 떠나온 이유는 가족이 모두 미국에서 자리 잡았고, 건강에 이상이 생겨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미주에서 열리는 공연을 대상으로 평을 썼는데 평론이라고 할 만한 공연과 무용인이 없다보니 그가 직접 한국서 무용단을 데려다 공연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지난 35년간 50회가 넘는다. 그 중 대부분은 한국의 인간문화재나 무용계의 일인자들을 불러온 초청 공연으로, 중요무형문화재였던 고 한영숙, 고 김숙자, 이매방, 강선영, 김천흥을 비롯해 예술원 회원 김백봉, 조흥동, 그리고 한국 무용계를 쥐락펴락하는 이화여대 육완순, 경희대의 김말애와 박명숙, 청주대 박재희, 한양대 이숙재에 이어 다음 세대 무용인들로 꼽히는 양길순, 이애주, 김묘선 등이 모두 이 회장의 초청으로 무용단을 데려와 미주 무대에 섰다.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게 하다가 만 기분”이라고 아쉬워한다. 그토록 애착을 쏟았던 LA 무용계가 지난 40여년 간 아무 것도 발전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기능을 익힌 사람들은 있지만 순수예술인 무용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무용을 예술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 그는 “때때로 미국 무용 공연을 볼 때 느끼는 뜨거운 감동으로 울고 싶은 공연을 한인타운에서는 만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나저나 3년 후에 나온다는 회고록, 정말 기대가 된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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