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이 숨지고 260여명이 부상당한 지난달 15일 보스턴 마라톤 테러사건도 거의 한 달이 돼가고 있다. 부상자들의 신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아물 것이지만 이번 테러로 미국민이 받은 정신적 상처는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이번 테러가 발생하자 한 미국 칼럼니스트는 보스턴 테러의 배후에 아랍이나 이슬람권이 아닌 미국 백인의 자생적 테러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잖아도 미국에서 이슬람이나 아랍권에 대한 시각이 안 좋은 상태에서 미국인의 제노포비아를 우려한 것이다. 제노포비아는 악의가 없는 상대방을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경계하는 심리상태를 일컫는다.
실제로 테러 발생 이후 중동 출신 등 유색인종을 겨냥한 증오범죄가 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압둘라 파루크(30)는 테러 당일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미국인 남성 3~4명으로부터 ‘아랍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 폭행을 당했다. 보스턴 인근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헤바 아볼라단(26)은 테러 이틀 뒤인 지난달 17일 30대 미국인 남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당시 그는 히잡을 착용하고 9개월 된 딸을 태운 유모차를 몰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또 사건 발생 직후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대학생이 마라톤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수사당국의 수사를 받았지만 이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보수 보도채널 폭스뉴스의 평론가로 테러 이전에도 이슬람에 대한 과격한 발언과 기고로 구설수에 올랐던 에릭 러시는 테러가 발생하자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국가 안보가 뻥 뚫렸다. 사우디인들을 마구잡이로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그는 ‘보스턴 테러가 무슬림 탓이냐’는 팔로워들의 질문에 “그렇다. 그들은 악마다. 다 죽여버리자”라고 답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당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보스턴 테러의 가장 비극적인 여파는 미국 누리꾼들이 보스턴 테러 용의자라고 지목하면서 누명을 썼던 명문 브라운 대학생 서닐 트리파시(22)가 지난달 23일 매사추세추주 프로비던서 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도계 미국인으로 외모가 아랍인으로 혼돈됐던 트리파시는 지난 3월16일부터 실종상태였으나 보스턴 테러 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제보들이 접수되면서 미국의 뉴스 공유사이트 ‘레딧’(Reddit) 등에서 테러 용의자로 지목됐다. 트리파시의 사진 등 신상이 인터넷에 적나라하게 유포됐고 뉴욕포스트 등 주류 언론도 1면 등에 주요기사로 트리파시의 신원을 공개했다. 이후 수사 당국은 트리파시가 보스턴 테러 용의자가 아니라고 공식 확인했다.
결국 레딧 측은 누리꾼들이 보스턴 테러 용의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에게 `마녀 사냥’을 저질렀다며 사과했다. 물론 트리파시가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그가 누명을 쑨 것을 비관해 자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보스턴 테러의 또 다른 비극임은 분명하다.
또 결국 단순 사고로 판명됐지만 보스턴 테러 발생 이틀만인 지난달 17일 텍사스주 웨스트 비료공장의 초대형 폭발사고로 14명이 사망하면서 당시 미국 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연방 상원의원들을 수신자로 하는 우편물에서 독성물질이 발견되면서 미국민들의 심리적 불안은 더욱 가중됐다.
미국민들은 무엇보다도 2001년 9·11 테러 이후 점차 잊혀 가던 미 본토에서의 테러 공포가 되살아났다고 두려워한다. 9·11 테러도 그렇지만 이번 사건도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차별 테러라는 점에서 미국민들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안방에서의 보안마저 구멍이 뚫렸다고 불안해하고 있다.
어느새 10년 전이지만 기자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종군기자로 중동지역 여러 국가를 취재하면서 방문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수도 텔아비브 거리에는 장갑차와 무장 군인들이 순찰을 나서면서 계엄령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심지어 휴가를 나온 여군까지 모두 소총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대중 교통수단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버스와 기차에 탑승하는 승객들은 남녀를 불구하고 무조건 신체와 가방 수색을 받아야 했다.
9·11 테러 이후 시행되고 있는 이른바 ‘애국법’으로 미국의 민권이 예전에 비해 열약해진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도 앞으로 이 같은 무차별 테러가 계속 발생할 경우 미국 역시 이스라엘 같이 되지 말라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테러의 가장 큰 피해는 인명이나 재산이 아닌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민권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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