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으로 지은 집·구멍 뚫린 벽 녹아내리는 왁스 조각품… 실험적이며 가변적인 세계 예술의 폐허적 풍경 재현
▶점토조각으로 가득한 게픈 모카 전시장에는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다.
▲16세기 조각품 ‘사비니 여인의 강간’을 왁스로 만든 대형 캔들. 전시개막 날부터 타오르기 시작,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
■ 현존 작가 최초 모카 2개 전시장서 특별전
지난 주말 LA 다운타운의 모카(MOCA) 현대미술관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가 시작됐다. 실험적이고 가변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출신 작가 어스 피셔(Urs Fischer)의 개인전이 4월21일부터 8월19일까지 모카 그랜드와 게픈 모카의 2개 전시장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모카 미술관이 현존 작가의 작품전을 2개 전시장을 통틀어 전시하기는 처음으로, 2008년 고 마틴 키펜버거 작품전을 두 곳에서 개최했던 것이 유일하다. 어스 피셔는 3년 전 뉴욕의 뉴 뮤지엄에서 열린 개인전도 큰 화제가 됐는데 뉴 뮤지엄이 한 작가에게 3개 층의 대형 전시장을 할애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정숙희 기자>
현대 미술계의 센세이션이라 할 만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어스 피셔는 1973년 취리히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제 39세밖에 안 된 젊은 작가로, 취리히에서 사진을 공부한 후 런던, 뉴욕, LA에 살면서 2004년부터 프랑스 퐁피두센터를 비롯한 전 세계 유명 뮤지엄과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 초대되며 역동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력만 보아서는 젊고 야심차며 카리스마틱한 아티스트일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면 너무나 예술가답지 않은(?) 외모에 놀라게 된다. 지난 19일 미디어 오프닝에 참석한 피셔는 뚱뚱한 옆집 아저씨처럼 너무나 후줄그레한 흰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은 소탈한 모습으로 누구하고나 친절하게 작품이야기를 나눴다.
팝과 다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피셔는 예술의 비영원성,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폐허적 풍경을 재현한다. 평범한 사물에 환상의 세계를 덧입히고, 규모와 형태의 변형을 통해 기존 개념을 부풀리거나 뒤바꿔 놓는 작업이다.
온갖 다양한 재료들(나무, 유리, 플래스틱, 흙, 메탈, 알루미늄, 야채, 왁스 등)을 사용하는 그는 섹스, 죽음, 폭력 등 섬뜩한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유머와 풍자와 동심을 섞어 표현하기 때문에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창조한다. 빵으로 지은 집, 구멍 뚫린 벽, 찌그러진 침대, 계속 녹아내리는 왁스 조각품, 다양한 포즈의 해골, 오브제의 다섯 면을 확대한 미러 박스 등 직접 보지 않으면 설명이 어려운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작들(모카 그랜드)과 함께 새롭게 구성한 작업(게픈 모카)을 동시에 보여준다. 두 곳의 전시는 내용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과연 한 작가의 전시인지, 그 아이디어와 스케일에 놀라게 되는데 일반 관람객들에게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는 게픈 모카에 펼쳐놓은 클레이 프로젝트(Clay Project)다.
무려 1,500명이나 되는 LA의 초·중·고등학생들이 작가와 함께 빚어놓은 점토조각들이 드넓은 공간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는 30만톤의 클레이가 사용됐으며 4주 동안 각지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신나게 진흙놀이를 하며 작업에 참여했다. 모카에 따르면 한인 학생들도 상당수 찾아왔다는데 입구 쪽에 세워진 벽돌조각에 누군가 한글로 쓴 낙서를 볼 수 있다.
사람, 동물, 건물, 동화, 환상, 추상적 소재를 사용해 만든 수천수만의 점토조각들은 너무나 기발하고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지 모르고 들여다보게 된다. 도예 전공자의 것인 듯 제법 멋진 조형물들도 있고, ‘최후의 만찬’을 풍자한 대형작품이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소꿉장난하듯 바닥에 펼쳐놓은 클레이 조각들은 너무 작고 많아서 걸어 다니는 도중 밟히기도 하는데 모카 측은 그런 훼손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어차피 미완성의 작품들이고 아직 덜 마른 것도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무너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며 사라져가는 과정 자체가 전시의 부분으로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어스 피셔의 작품인 3개의 왁스 스컵처가 눈에 띈다. 흙 반죽들 사이에 생뚱맞게 서있는 남자와 의자, 그리고 ‘사비니 여인의 강간’(Giambologna의 1583년 작품)을 왁스로 만든 조형물이 그것으로, 이 3개의 대형 캔들은 전시개막 날부터 타오르기 시작,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녹아내리며 형태가 일그러지게 된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피셔의 작품은 텅 빈 방처럼 보이는 전시장이다. 처음엔 전시장이 아닌 줄 알고 지나치게 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방 사면과 바닥, 천장 모서리 구석구석 전체가 사진으로 도배된 것을 알 수 있다. 피셔는 바로크시대 벽에 그리던 눈속임 그림(trompe-l’oeil) 기법을 사용, 환영에 의한 착시가 아니라 뉴욕의 스튜디오를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아 벽에 붙임으로써 눈속임을 유도하고 있다.
게픈 전시는 꼭 관람하기를 권한다. 이왕이면 모카 그랜드도 보고…MOCA Grand Ave. 250 S. Grand Ave. LA, CA 90012Geffen Contemporary at MOCA 152 N. Central Ave. LA, CA 9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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