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올랐던 정치가의 이름에 ism을 붙여 그가 추진했던 경륜이나 정책을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지난 월요일 사망한 마가렛 대처 전 영국수상은 예외이다. 그럴 정도로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보수당 당수 겸 영국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영국을 변모시킨 지도자였다는 게 중평이다. 대처이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영국은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를 추구하던 사회주의 국가였었다. 주요 기업들은 모두 국유화된 상태에서 세율은 높을 대로 높아져 있는데다가 강력한 노조들의 자주 있던 파업으로 사회 전체가 마비되기가 일쑤여서 영국은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받아왔었다. 대처 사망 이후의 여러 칼럼니스트들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대처는 아버지와 남편의 영향과 후원으로 젊었을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소도시의 자그만 식료품점 주인으로 이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던 보수당원이었던 바 딸이 열 살 정도일 때부터 정치 집회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론이나 연설 등 정치인들의 필수 자질을 습득하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마가렛은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는 10년 연상의 데니스 대처를 만나 결혼을 한다. 페인트 소매업을 하던 대처는 부인이 법률 공부를 하도록 격려했을 뿐 아니라 세법 전문 변호사가 된 후 이곳저곳의 지방 선거에 출마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58년에 마가렛은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1970년에 보수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마가렛은 교육부장관이 되었던 바 재무부로부터 교육예산을 감축하라는 영을 받고 학교에서 주는 무상 우유 공급을 중단시켰기 때문에 “인정머리 없는 대처(Thatcher the uncaring)"이란 욕을 받기도 했었다.
보수당답게 남자들이나 당 지도자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던 당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당권에 도전하여 1974년에는 당시의 야당이던 보수당의 지도자가 된다. 1979년 총선에서는 오랫동안 계속된 경제 불황, 파업들로 인한 사회 불안 등 소위 불만의 겨울 때문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보수당에 정권을 맡기게 되었다.
처음 몇 해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등으로 대처 수상은 인기가 없었지만 많은 국유 기간산업들을 사유화하고 친자본주의, 친시장주의의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극성이던 북아일랜드의 IRA의 테러 대상이 되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아 예정된 당 회의를 주재했다든지 남자 못지않은 담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알젠틴에서 영국 소유 포클랜드섬을 침공했을 때 각료들을 포함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영국 군대를 파견하여 승전함으로써 침체가 되었던 영국 국민의 사기를 북돋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직후에 있는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가 뒤따랐다.
특히 영국을 여러 차례 마비시켜오던 광산 노조의 위원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비생산적인 국유 광산들을 폐쇄함과 동시에 불법 파업을 하던 노조원들을 가차 없이 의법 억제하여 노조의 힘을 꺾었다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는 칭송을 받는 반면 노조원들이 가족들에게는 두고두고 욕을 먹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대처는 서방 세계에서 최초로 정치 정상에 오른 여자라는 이유로만도 역사적 인물이지만 빈부 격차 등 사회 부조리의 계속 가운데서도 영국사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이 평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는 일맥이 상통하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여 영미 제국의 영향력이 특히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제국 붕괴로 최고조에 달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소련 신문들은 대처를 철의 여인(Iron Lady)이라 부르기 시작했었던 바 대처는 그 칭호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고 그에 걸맞게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의 지지자들의 변이다.
사실 대처는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데도 출중했던지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만났을 때 “이런 사람이면 교섭 대상이 된다”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레이건에게도 그처럼 설복시켰다는 후일담을 남겼다.
대처의 사망 이후 지지자들은 그의 업적을 칭찬하는 한편 반대자들은 그의 정책 때문에 경제 하층에 속한 사람들의 고통이 크다고 그의 치적을 깎아 내린다. 대처의 집이 있는 곳에 많은 꽃다발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대처의 우유 공급 중단 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을 항의하기 위함인지 우유병들을 집 부근에서 쏟아 붓는다는 보도이다. 인간 정치 지도자들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11년 이상 집권한 탓에 교만해졌던지 나중에는 다른 각료들의 조언을 무시하곤 했기 때문에 자신의 내각의 압력 때문에 총리 관저를 눈물로 하직했다는 점도 그의 결함일 것이다. 그러나 대처가 여걸이었음에는 별 이론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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