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럼가에서 세계 패션 리드하는 곳으로
▶ 영국 점령기 고급주택가서 19세기 초 뉴욕 제1의 환락가 변신
20세기 초까지 부랑자 거리 오명...이후 수많은 유대계 이주
값싼 노동력 바탕 봉제산업 종사 패션 도시화 기여
시티홀, 그리고 캐널 스트릿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다소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보워리 일대와 만나게 된다. 당초 이 지역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교외에 자리한 농장이었다. 하지만 영국 점령기로 접어들며 도시 서쪽의 고급주택지로서 변모했다. 농장이 자리했던 입지, 그러니까 주위 환경이 온통 숲과 밭이었던 관계로 일종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로 발전해온 것이다.
이후 19세기 초 이 일대는 ‘뉴욕 제1의 환락가’로 극적인 변신을 다한다. 1886년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낙하하는 이벤트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스티브 브로디의 바를 비롯, 다양한 공연장, 클럽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그로 인해 일대를 ‘뉴욕 엔터테인먼트의 근원’이라 부르는 이조차 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비교적 저속하다 부를 수 있는 예술이 주를 이루며 고급주택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며 다시 한 번 색깔을 바꾸게 된다. 아예 1860년대 이후부터는 ‘싸구려 볼거리’ 혹은 ‘저속한 즐거움’을 찾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1878년 이후 3애비뉴의 고가도로가 이 위를 달리고 매연과 석탄 쓰레기가 널브러지자, 보워리를 중심으로 한 로어 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는 싸구려 아파트나 매춘의 소굴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흔히 저렴한 아파트라 불리는 ‘테너먼트’ 혹은 지하 주거를 가리키는 ‘셀러 하우스’에서 임의대로 여러 개의 방을 나눈 이들이 최저 생활을 누리게 된다. 당시 뉴욕의 매춘부 10,000명 중 약 30%(캐널 스트릿은 약 20%)가 일대에 거주한 것은 물론, 각종 부랑자와 상이군인들이 잇따라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20세기 초부터 이 지역은 스키드 로(Skid Row)라는 오명으로 불린다. 이름 그대로 ‘부랑자의 거리’. 사실치고는 너무나 적나라한 이름이다.
지금도 지역내 골목을 거닐다보면 휑한 느낌이 휘몰아친다. 인적도 드물고 길 한 모퉁이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피할 수 없다. 비록 이전보다는 많이 개선되었다 해도 사람들이 느끼는 ‘왠지 찜찜한’ 기분만은 다 지워내지 못했다. 현실과 심리 사이의 커다란 간극. 로어이스트사이드는 여전히 그 인식적 괴리와 폐쇄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가난이란 현실을 벗고 세련된 뉴욕 패션을 주도하는 유대계
1890년 덴마크계 이민자로 ‘뉴욕 선’의 기자 출신인 제이콥 리스는 일종의 르포 보고서 ‘나머지 반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발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생활상을 생생히 그린 글과 사진으로 세간 일반에 충격을 준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뉴욕 트리뷴’의 특별 기고문으로 쓰였으나,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을 더해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당시 이 책의 광고 문구는 ‘가난하고 어두운 현실을 (카메라) 빛으로 비추다’였다. 이 책을 통해 리스는 포토저널리즘이란 신기원을 연 것은 물론, 그 때까지 사람들이 바라보던 가난이란 문제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저 개인의 태만이나 게으름에서 초래되는 것이 가난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이후 그것을 사회적 구조나 제도에 의해서도 가난이 초래될 수 있다는 맥락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100여 가구가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에, 전기나 수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비참한 삶이 가감 없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그 사회적 왜곡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아 불합리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졌다.
한편 20세기 초 로어이스트사이드에는 수많은 유대계가 몰려들었다. 2003년 공개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갱스오브뉴욕’에도 나오듯, 초기에는 아일랜드계가 중심을 이루나 이어 러시아계와 동유럽계가 대거 이주해왔다. 이는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격리 수용하고 교육이나 취업에 차별을 두는 과정에서 초래되었다. 1910년 이미 125만 명의 유대계(현재는 154만 명, 12% 비중)가 거주한 뉴욕에서도 동유럽계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한 때 학비가 저렴한 CUNY(뉴욕시립대) 학생의 85%가 유대계일 만큼 그 규모는 상당했으며, 지역내 자리한 시나고그에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키키즈’ 혹은 ‘카이크’라는 용어가 경멸적인 뉘앙스로 쓰이기도 했다. 이는 동유럽계 이름이 ‘크’나 ‘키’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조롱해서 표현한 말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유대계가 취업이나 결혼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독일계 이름으로 바꾼 아픈 기억도 서려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봉제 산업에 종사해 뉴욕의 패션 도시화에도 크게 기여한다. 물론 시간이 가며 봉제 같은 하청에서 벗어나 디자인까지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남다른 손재주에, 특별한 감각이 더해지면서 이들이 만들어낸 패션은 점차 주류가 되어갔다. 이후 이들의 후예로 태어난 캘빈 클라인(CK)과 랄프 로렌(POLO), 도나 카란(DKNY) 등이 뉴욕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한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고부가가치의 일에 접근조차 어렵던 이들이, 이제는 그 산업의 주도자로 변모했다는 사실. 역사는 늘 이렇게 아이러니의 연속으로 나타나곤 한다.
■ 주욕은 모욕적인 말?
20세기 초 로어이스트사이드에는 수많은 유대계가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이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뉴욕의 ‘New’를 유대인을 뜻하는 ‘Jew’로 바꿔 ‘Jew York’이라 바꿔 부르기도 했다. 특히 이후에 그것이 더 확장되어 ‘Zoo York’, 즉 ‘동물원 같다’는 의미까지 포함시켰다. 이들이 사는 열악한 환경을 동물원에 빗댄 이 말은, 경멸적인 뉘앙스로 이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낳는데 일조했다. 물론 1990년대 들어 ‘활동적인 스트릿 패션을 기치로 든’ 동명의 패션 브랜드가 런칭해 주목을 끌었으나, 뉴욕에서 이 단어들은 오인될 수도 있으므로 삼가해 쓰도록 하자.
이수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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