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은 서방 자유 민주주의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때였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됐고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중동 전체가 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됐다. 아프리카의 3분의 1이 친소 노선을 걸었고 동유럽 전체가 소련 군화 발에 짓눌려 있었다. 중남미에서는 해방신학과 종속이론을 신봉하는 좌익 세력과 공산 게릴라가 준동하고 이에 맞서는 우익 독재와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반면 서방은 2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한 장기 불황으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서방 전체가 비슷했지만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세계를 재패했던 영국의 사정은 특히 비참했다. 청소부들의 파업으로 런던 전체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철도, 통신, 간호원, 전기 등 노조란 노조는 모조리 파업을 벌이는 통에 정전과 통신 두절, 교통마비가 다반사였다. 90%가 넘는 중과세로 기업은 투자 의욕을 잃고 거리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넘쳐났다.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종말을 맞고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처럼 보였다.
이런 어두운 시절 희망의 불씨는 로마에서부터 피어올랐다. 1978년 10월 폴란드의 추기경 카롤 보이틸라가 예상을 뒤엎고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다. 비 이탈리아인이 교황이 된 것은 455년 만에 처음이고 58세의 젊은 교황이 탄생한 것은 130년 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KGB 총책이자 훗날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는 그의 반공 성향에 심한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서기장이 되자마자 죽기는 했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모양이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가를 직접 목격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다음해 폴란드를 방문, 인간의 자유와 영혼의 존귀함을 가르쳤다. 공산권 최초의 자유 노조인 ‘솔리대리티’는 그의 비호 하에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9년에는 폴란드 출신 교황 선출 못지않은 역사적 사건이 영국에서 벌어졌다.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가 영국 역사상 처음 여성 총리로 선출된 것이다. 대처는 취임하자마자 시장주의 원칙에 입각해 고실업, 저성장, 고인플레로 요약되는 영국병 치료에 나섰다. 규제를 풀고 세금을 깎아 투자 의욕을 높이고 금리를 올려 인플레를 잡았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공기업은 팔거나 폐쇄하고 대대적인 인원 감축으로 적자를 줄였다.
대처의 이런 정책은 필연적으로 노조와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1984년부터 1년간 계속된 탄광노조와의 싸움은 ‘내전’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했다. 그러나 대처의 정책이 서서히 효력을 발휘하면서 여론은 대처 편으로 돌아섰고 1년 후 노조는 백기를 들었다.
대처의 이런 승리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져다 준 정치적 자산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군부가 영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포클랜드 섬을 무력 점령하자 일부에서는 이를 포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처는 단호히 응징에 나섰으며 아르헨티나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 그 결과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일삼던 아르헨티나 군부는 몰락했으며 이것이 중남미 민주화의 도화선이 됐다.
대처 취임 다음해 미국에서 대처와 정치 노선을 같이 하는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가 같은 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살리자 도도한 사회주의 물결에 묻힐 것 같던 시장 경제는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된 것은 이들의 공고한 경제적 업적과 뚜렷한 반공 정책 덕분이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교황과 대처, 레이건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는 런던 타임스 편집장을 지낸 존 오설리번이 쓴 ‘대통령, 교황, 그리고 총리’라는 책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중 한 명인 대처가 8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대처의 삶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꿈과 그것을 실현할 의지가 있는 인간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만이 세상을 바꾼다”던 스티브 잡스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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