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은 양을 찾던 목동이 동굴서 사해사본 발견
▶ 쿰란유적서 구약사본, 주석, 규율집 등 대량발견
‘마사다’는 로마에 투쟁했던 슬픈 역사의 현장
이스라엘 관광청에 따르면 이스라엘 지역의 경계선은 서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요르단 계곡, 북쪽으로 레바논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 에일랏 만이다. 이 경계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족장시대로부터 줄곧 전개되었다.
이스라엘을 전체적으로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쳐있는데 크게 3지역 즉, 1)해안 평야지대 2)산악지대 그리고 3)요르단 계곡으로 나뉜다. 요르단 계곡은 서쪽과 동쪽의 고원지대 사이에 세로로 길게 뻗어 있는 계곡으로 요르단 강이 흐르며 갈릴리 호수와 사해(Dead Sea)도 포함된다. 사해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저지대(-417m지하)에 속한다.
성경에는 오늘날의 사해에 대한 구약의 명칭으로 염해(Salt Sea, 창14:3), 아라바 바다(신3:17), 동해(슥14:8)로 기록되었다. 오늘은 요르단 계곡의 하부에 위치하며 사해(Dead Sea)를 내려다보는 쿰란(Qumran)과 마사다(Masada)를 알아본다.
4.사해사본의 유적지 쿰란 (Qumran)
여리고 남쪽으로 약 10마일 지점의 사해변에 쿰란 유적지가 있다. 쿰란은 ‘엣세네파’의 수도원 터이다. 사해 사본이란 쿰란 유적지 동굴에서 발견된 양피지, 파피루스 등 유대교 문서를 총칭하는 말이다. 1947년 쿰란 지역에서 잃은 양을 찾던 한 베두윈(양, 염소, 낙타같은 가축치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유목민들) 소년에 의해 우연히 2,000년간 숨겨져 있던 성경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이 발견되어 고고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성경연구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후 1951-1956년까지 R. 드보와 프랑스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은 처음 사본이 발견된 주위를 정밀하게 탐사하여 다른 많은 사본들을 발견하였다. 많은 사본들은 접근이 어려운 동굴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본을 보관할 필요를 느낀 에센파들이 이런 비밀동굴에 숨긴 것으로 판단된다. 반경 1Km 이내에 있는 11개의 동굴에서 찾아낸 600여 편의 사본가운데 1/4이 구약성경이다. 나머지는 쿰란 공동체가 쓰던 규율집, 구약주석, 신학문서 등이다.
베두윈이 발견한 동굴은 1, 2, 4, 6, 11 동굴이며 고고학자들은 3, 5, 7, 8, 9, 10 동굴을 발견하였다. 제 4동굴은 가장 많은 사본이 발견된 동굴로 200개가 넘는 사본에 15,000개 이상의 사본 조각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122개의 성경 사본이 포함되었으며 에스더를 제외한 구약성경의 모든 사본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풍부한 자료들은 에센공동체와 신약 및 구약 관련 학문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사본들이 2,000년이 지나도록 기적처럼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광야의 고온건조한 기후 때문이다. 당시 발견된 많은 사본은 항아리에 보관되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사해사본 전당의 둥근 지붕은 항아리의 뚜껑모양을 본뜬 것으로 사본들이 발견된 당시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으며 쿰란에서 발견된 각종 고귀한 성경사본과 다른 사본들을 소장하고 있다.
쿰란의 거주 역사는 BC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지역이 주목받게 된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말부터 1차 유대인의 반란 때까지 사해 사본을 기록한 에세네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에센 공동체(Essenes Sect)는 주전 150년 - 주후 68년까지 활동했던 유대 종교의 한 분파이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1세기 유대 종교분파를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에센파로 기록하였다. 엣세네파는 기도, 연구, 경건, 독신, 무소유, 자비와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는 금욕적인 신앙공동체이다.
주전 31년 큰 지진으로 에센 공동체의 주거지역이 심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헤롯 아켈라오스가 통치하던 때(BC4년 ~ AD6년) 에센 공동체는 쿰란으로 돌아와 다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이 68년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그들이 떠날 때의 상황이 로마군에 학살당하는 순간이었기에 동굴 속에 성경을 숨겨두고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68년 1차 유대인 반란 때에 쿰란공동체는 로마의 점령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해가 보이는 유적지에서 성경 필사실(Scriptorium), 수로, 목욕장, 물저장소, 주방, 회의장, 탑 등이 발굴되었다.
5. 슬픈 역사의 현장: 마사다(Masada)
마사다는 유대인들에겐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아픔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로마침략에 항거하며 이곳에서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그들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1세기 유대 바리새인들에 얽힌 이야기이다. 마사다는 아랍어로 ‘요새 ‘(fortress)라는 뜻이다. 사해 근처에 있는 높이가 사해 수면으로부터 약 500m에 이를 만큼 우뚝 솟아있고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이다. 마사다는 헤롯대제가 유사시를 대비하여 BC 40년경에 마사다 동북쪽에 요새와 헤롯궁을 지었다고 한다.
마사다에 대한 이야기는 반란 초기부터 함락까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 고고학 발굴자료로 잘 이해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 부분들도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열심당원(Sicarii) 들은 로마에 저항하기 위하여 마사다를 차지하였다. 로마에 저항한 1차 유대인 반란은 66년 로마총독 플로우스(Florus)때 발생하였다. 마사다는 유대 광야의 외진 곳에 위치한 관계로 로마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70년경 로마의 피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사실상 유대 땅은 로마에 점령되었다. 로마군에 의해 유대민족의 정신적 최후 보루인 예루살렘 성전이 소실되고 시가지는 무너졌으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소요는 멈추지 않았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자 로마 군대는 71년 예루살렘 남쪽 ‘헤로디움’과 요단 동편 ‘마케루스’를 함락한 후에 최후의 결사 항거지로 삼아 전투했던 ‘마사다’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73년 또는 74년 로마의 총독이며 10군단 총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는 최후의 항거지인 마사다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로마 군사들은 마사다 주변에 방어벽과 공격을 위한 토성을 세웠다. 해발 450m-500m, 넓이200m, 길이600m의 헤롯왕의 요새 궁전은 로마군이 3년에 걸쳐 마사다의 높이와 맞먹는 인공적인 토담을 쌓아 모든 침공 준비를 완료하였다.
로마의 마지막 공격이 있기 전 엘리에젤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의 결연한 연설이 요세푸스의 글에 남아있다. 3년 동안 포위된 상황에서 73년 로마군의 최후의 공격을 받기 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은 이들은 엘리에젤 벧 야이르의 연설과 함께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겠다며 모두가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사건은 2,000년 전인 73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날 밤에 죽은 사람의 수는 모두 960명이었다.
이후 간간이 민중항거운동 세력도 등장했으나 그 세력도 약화되자 그들은 세계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여기서 짓밟히고 저기서 학살당하는 비참한 유대 민족사를 점철하게 된 것이다. 유적으로는 거대한 크기의 궁전, 곡식창고, 목욕탕 그리고 수로시설은 헤롯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글 정한옥 목사,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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