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는커녕 생쥐라도 그릴 수 있을지…연방의회에서 막후 협상 중인 총기규제법안의 입지가 영 불안하다. 자칫 마르코 루비오, 랜드 폴, 테드 크루즈 등 필리버스터를 위협하는 공화당 젊은 스타들의 혈기에 눌려 표결조차 못하고 폐기되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어린이 20명이 집단살해당한 뉴타운의 참사가 발생한지 아직 넉 달도 채 안 지났다. 그런데 당시 미 전국을 들끓게 했던 충격과 분노도, 총기규제 강화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을 넘어서며 “이번엔 다르겠지” 부풀었던 변화에 대한 기대도 이미 시들기 시작했고 총기규제 강화법안은 산소호흡기에 매달린 채 위독한 상태다.
뉴타운 참사의 범인 애덤 랜자는 5분 만에 반자동 소총으로 154발을 난사했다. 그가 사용한 총이 공격 무기인 부시매스터 라이플이 아니었다면, 30발씩 장전하는 대용량 탄창을 몇 개나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상당수 아이들의 생명은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난 1월 “대통령이 가진 모든 파워의 활용”을 천명하며 제안했던 오바마 대통령의 총기폭력 대책은 야심찬 내용이었다. 공격용 무기 및 대용량 탄창의 판매금지와 모든 총기거래에 대한 신원조회 확대 등을 포함한 포괄적 대책이었다.
이 같은 총기규제안이 사안별로 연방상원 법사위를 통과한 것이 3월 중순, 그러나 2주전 공격용 무기 및 대용량 탄창 금지안엔 사실상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가 상원 본회의 표결에 회부될 기본법안에서 이 두 사안을 제외시킨 것이다. 반대하는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를 저지할 60표 지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리버럴 진영은 “겁쟁이 의회와 무능한 대통령이 오만한 전국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에 밀려 싸워보지도 않은 채 굴복했다”고 비난했지만 리드에겐 현실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양이든 생쥐든, 일단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폐기처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꺼져가는 총기규제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오바마는 이번 주부터 다시 여론몰이 홍보 길에 나섰다. 어제는 콜럼바인과 오로라 총기난사사건의 현장으로 최근 총기규제 강화법안을 실현시킨 콜로라도를 방문했고, 다음 주엔 뉴타운 참사 후 초강력 총기규제안에 합의한 코네티컷 주로 날아간다.
공격용 무기와 대용량 탄창 금지안이 사실상 죽어버렸으니 이제 남은 핵심은 신원조회 확대다. 한두달 전만 해도 통과가 무난할 것으로 예상했던 사안인데 지금은 이마저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하다. 3일 덴버 경찰아카데미 연설에서 오바마는 재차 반문했다 : “도대체 왜 의회는 신원조회 확대를 통과시키지 않으려는 겁니까?”
총기박람회와 온라인 구매, 개인 간의 거래까지 모든 총기 거래 시 신원조회를 의무화하자는 법안이다. 범죄자 수중에 총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총기소유주까지 포함한 여론 지지율이 90%를 넘는다. 개인주의 강한 미국인의 여론이 이정도의 합의를 보인 정책이슈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왜? 의회는 입법화를 못시키고 있는 것일까.
전국여론과 각 지역의 당선 여부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NRA의 위협에 내년 재선을 앞둔 보수지역 중도파 의원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조직과 자금이 막강한 NRA는 규제강화법안에 찬성표를 던질 경우 내년 선거에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드러내놓고 경고한다. 총기 소유주가 700만명에 이르는 나라의 총기협회 파워를 어느 정치가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리드는 다음 주 부활절 휴가에서 돌아오면 맨 먼저 총기규제를 다루겠다고 약속했지만 양당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상정은 늦어질 것이다. 신원조회 확대 범위는 될수록 축소하고, 신원조회는 확대해도 그 기록보관은 의무화하지 말고…NRA의 비위를 덜 거스르려는 공화당의 물타기 작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오바마가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싶었을 총기규제 법안의 앞날은 지금으로선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요즘 워싱턴에서 자주 인용되는 어구가 있다. 비스마르크의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 현재 총기규제법안의 가능한 최선의 결과는 ‘통과’다. 민주당 찰스 슈머와 공화당 톰 코번, 두 중진의원의 타협이 잘 이루어져 물타기로 약해진 규제안이라도 필리버스터를 저지하고 살아남는다면 ‘통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장기적 투쟁을 향한 첫 걸음으로 삼는 것이다.
다음이 더 문제다. 상원안은 공화당 주도의 하원으로 송부되는데 거기서 온전히 살아남기 또한 힘들 테니까.
지난 1월 상원 법사위 청문회에 출두했던 개비 기퍼즈 전 하원의원은 총격후유증 때문에 어눌해진 어조로 의원들에게 당부했다. “용감해 지십시오.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죽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동할 때입니다. 국민들은 여러분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명만이라도 총기폭력 피해의 산 증인으로 선 전 동료의 호소를 통해 정치엔 “선거보다 중요한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라는 것조차 ‘사치’임을 요즘의 워싱턴은 매일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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