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 말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죽어서도 말이 되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고 한 것처럼 죽어도 말이 되는 말들이 있다.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과 스승,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아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아직도 우리의 영혼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기에 비록 그가 죽었지만 그가 가진 믿음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했다(히브리서11;4).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돌아오고, 진심은 거짓 속에 묻히고, 충성은 휴지 조각처럼 아무런 빛을 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와 울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부정적 생각으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이는 보복성 행동을 하거나 또는 자해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사람들은 악하고, 사회와 조직은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 차 있기에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가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깊이 깔려 있는 진리는 침묵이다.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어 말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언어는 침묵이다. 예수님은 말씀이셨다. 말씀이라는 뜻은 예수님의 본질과 본체는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입을 열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전파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입을 여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셨지만 침묵할 때는 침묵하셨다. 침묵이 또한 말씀임을 아신 분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심문을 했다. 이것을 빌라도의 재판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또 성전을 헐고 사흘만이 짓겠다고 한 것을 오해하여 전통적 종교전통을 무너뜨렸다고 고소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고, 변호하고, 고함을 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곧 자신이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심문하면서 예수님께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물었지만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것을 구약성경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예수님은 한마디 변명이나 변호의 말없이 초라한 죽음을 십자가에서 맞이했다. 그러나 그가 죽었으나 지금 살아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었다. 그 침묵은 위대한 설교였고, 예언이었고, 교훈이었다. 그 침묵은 도리어 사랑과 용서의 변(辯)으로 온 세계를 울리는 말씀이 되셨다. 침묵으로 죽었으나 다시 부활하여 웅장한 말씀으로 감동시키셨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의 십자가가 온 세상에 사랑의 종소리로 울리도록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의의 죽음, 사랑의 희생, 대속의 십자가임을 알게 한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변(辯)이셨다.
우리에게는 각자 소리들이 있다. 바다 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오해를 풀고 싶은 말들, 논리, 주장, 뜻, 해석에 대한 소리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낼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다. 합창의 묘미는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라, 소리를 죽이는 데에도 있다. 내 소리는 죽고, 다른 사람의 소리가 나게 할 때 조화, 곧 하모니가 되는 것이다. 내 목소리가 커지면 내가 할 말, 곧 변(辯)을 잃게 된다. 그러나 내 목소리를 죽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말과 언어, 곧 변(辯)을 들을 날이 올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처럼, 언젠가는 꼭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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