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최대·최장의 현수교...세게 8대 불가사의 중 하나
뉴요커 생활 반경. 도시 경제 활성화 지대한 기여
아름다운 주위 경관. 황홀한 야경 등 관광객 사로잡아
▲도시의 랜드마크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다
시티홀을 낀 채 파크로 방향으로 돌면 ‘세계 최초·최대의 현수교’로 유명한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를 만나게 된다.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운 야경을 비롯해 이동과 물류의 편의성, 아울러 퍼블릭 아트의 전시장이자 도시의 랜드마크로서 그 의의는 크다. 맨해튼을 잇는 5개의 브리지, 그 중에서도 브루클린과 맨하탄을 잇는 세 교량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브루클린 브리지는 도시를 상징하는 대표 교량으로 첫손에 꼽힌다. 이 다리의 탄생을 기점으로 188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뉴욕의 경제와 건축, 문화는 커다란 변곡점을 그리게 된다.
브루클린 브리지-시티홀 역(지하철 4·5·6라인) 건너편에 자리한 산책로 입구에 다다르자 가판대가 하나 둘 눈에 띈다. 각종 음료나 과자를 비롯해 각종 기념품을 파는 이까지 종류도 가지가지. 이윽고 좁은 길로 접어들자 긴 아스팔트길이 나온다. 가운데 노란 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보도, 왼쪽이 자전거 길, 저 멀리 커다란 교탑이 보이는 가운데 완만한 경사로 양쪽으로 차들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다. 이 차로는 다리 가운데로 접어들면서 산책로 아래로 들어가고, 첫 교탑에 접어들 때쯤 방문객은 다리 맨 위에 서게 된다. 다리와 내가 하나가 된 순간이다. 사진 한 장 찍으려 관광객이 항상 붐비는 교탑 부근에는 1883년 완성된 다리의 역사를 말해주는 동판이 붙어 있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도 보이고, 인근 로어 맨하탄의 전경은 시원스러움 그 자체다. 유유히 흘러가는 이스트강 위에 선 채 전후좌우로 그려진 이색적 광경이 마냥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 시절 어떻게 이 멋진 다리를 완성시켰을까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아
사실 다리 건설과 연관된 계획은 1811년 토마스 포프가 <다리의 건설에 대해(A Treatise on Bridge Architecture)>라는 책에서 주창한 ‘자유 속에서 나오는 혼으로 하늘까지 이르는 다리’, 소위 ‘무지개 다리(Rainbow Bridge)’에서 출발한다.
이에 독일 출신 건축기사 존 뢰블링이 철학자 헤겔의 영향을 받아 ‘위대한 우주 정신을 완성시키고자’ 다리 건설에 나선다. 1869년부터 14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강 위 길이만 해도 1,132m에 이르는 ‘세계 최장의 현수교 방식(서스펜션과 케이블을 이용한 건설법)’을 차용했다(높이 80m가 넘는 두 개의 교탑을 세우고, 직경 45㎝의 강철 케이블을 이었다).
다리가 건설되기 전 맨하탄과 브루클린은 각각 이질적인 도시였다. 그 때까지 두 지역을 잇는 교통수단도 페리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증가 일로를 걷던 브루클린의 인구가 정점에 다다르면서 페리의 수송 능력은 한계에 부딪혔다. 불과 10년 만에 50%나 인구가 증가한 가운데, 1867년 교량 건설을 위한 민간 회사 설립이 정식으로 인가된 것. 그리고 주임기사로 이미 12년 전 나이애가라 일대에 교량을 세운 경험이 있는 뢰블링이 임명되었다. ‘미국을 희망의 나라’로 찬미하며 대서양을 건넌 그는 스승 헤겔의 철학을 실질적인 사물로 증명코자 했다. 그것은 철학과 건축, 수리학 등을 두루 섭렵한 피 끓는 청년이 그 때까지 흔한 종교적 자유나 가난 탈출이 아닌, 스스로의 이상 실현을 위한 결심이라는 점에서도 새삼 주목을 받았다.
당시 공사 현장에는 사고가 빈발했다. 존 뢰블링을 비롯해 20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낙하·추락 사고를 겪었다. 물론 사고의 대부분은 업자들이 공급한 와이어나 로프에서 초래되었다. 이들이 뇌물이나 부당 거래를 통해 기준 미달의 제품을 납품했던 것이다. 당시 브리지 건설의 중요성과 별개로, 업자로부터 받는 정치인들의 뇌물수수는 ‘사상 최악’이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다리 건설에 든 총 공사대금 중 약 30%가 뇌물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질 정도. 이로 인해 1,550만 달러라는 거액의 경비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사 막바지에는 자금 부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부상자의 보험금을 받는 대신 그 업자들로부터 다시 와이어와 로프를 공급받는 열정(혹은 과욕)을 보인다.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1883년 봄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찬사 속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당시 개통식에는 체스터 아서 대통령과 클리블랜드 뉴욕주지사(이후 대통령 취임)가 참석했으며, 개통 당일에만 10만 명이 넘는 대인파가 다리를 건넜다. 당시‘뉴욕 선’은 ‘아서 대통령이 신발 하나 젖지 않고 두 도시를 건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보행자의 통행료는 1센트.
▲각종 사고와 잇따른 자살, 하지만 그 관심과 주목도만큼은 절대적
브루클린 브리지는 개통 뒤에도 각종 사고가 끓이질 않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한 참사와, 잇따른 자살로 죽음의 메카란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다리를 개통한지 1주일 정도 지난 시기, 한 소녀가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누군가가 ‘다리가 무너진다’고 소리치자 황급히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 중 12명이 압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또한 이 다리는 1931년 5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완성될 때까지 자살의 수도라 불리는 불명예까지 안게 된다. 원래 이 다리에서 처음 뛰어내린 이는 1885년 워싱턴 DC의 수영강사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낙하 즉시 사망. 이듬해 스티브 브로디라는 인물이 도전에 성공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무명의 연극 배우였던 그는 세간의 주목을 끌어볼 목적으로 이 같은 무모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그러나 성공 후 지역지‘브루클린 이글’은 그의 낙하에 트릭이 감춰졌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실은 다리 위에서 인형을 던진 채, 본인은 강 아래로 헤엄쳐 나왔다는 것이 사건의 전모다.
한편 이 다리의 건설은 여러모로 도시에 사회·문화적 발자취를 남긴다. ‘유럽식 이상의 현실 적용’이라는 명분 외에도, 이민 노동자를 다수 고용해 도시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아울러 상징물로서 도시 통합의 매개체가 되었고, 교통과 통행 흐름은 한층 더 원활해졌다. 그리고 관광지로서의 매력에 더해 남다른 건축사적 의의, 또 뉴요커들의 생활 반경과 스타일에도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 샌프란시스코에 자리한 골든게이트 브리지나 뉴저지-맨하탄을 잇는 조지워싱턴 브리지보다 이 다리가 지역민들에게 더 사랑 받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주위 경관과의 조화 속에 특유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킨 매력 때문은 아니었을까.
비록 그 의견은 양극단으로 나뉘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다리에 쏟은 관심과 주목도만큼은 절대적이었다. 심미적 작가로 유명하던 헨리 제임스는 이 다리를 ‘기계적 괴물’로 폄하했지만, 미술가 존 마린은 ‘약동하는 위대한 힘’, 조셉 스텔라는 ‘끝없는 에너지’라 불렀다.
한편 시인 하트 크레인은 1930년 지은 <브리지(The Bridge)>라는 시집에서 이 다리를 ‘영원의 생명을 잇는 현대의 신화’라 추앙하기도 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어우러져 뉴욕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극대화되듯, 이 다리가 지닌 문화사적 가치 역시 여러 목적의 조화로 완성된 것이다. <이수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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