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최대 박물관 탄생할까
지금 LA 문화예술계는 어마어마한 딜 한 건을 놓고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에 온 관심이 집중돼 있다.
수년째 재정난과 경영난을 겪고 있는 모카(MOCA) 현대미술관을 LA카운티 미술관(LACMA)이 인수 합병한다는 계획이 그것으로, 라크마는 1억달러의 모금 지원과 모카 이름 및 다운타운의 두 전시장을 유지한다는 오퍼를 지난달 24일 전달한 바 있다. (3월7일자 본보 2면 보도)
이 거래가 성사되면 라크마·모카 통합체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버금가는 미 최대의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배경이 너무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서 과연 이 딜이 어디로 갈지 연일 화제가 무성한 것이다.
LA타임스는 3월8일 처음 이 사실을 보도한 이후 일주일 동안 무려 5차례나 물밑작업을 심층 보도함으로써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향후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재정뿐 아니라 경영 악재까지 겹친 모카의 현 상황과 여기에 얽힌 억만장자 후원자 일라이 브로드(Eli Broad)와의 관계다.
1983년 개관한 모카는 빠른 시간 내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으로 성장했으나 만성적자에 시달리다 2008년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도 라크마가 인수 의사를 표명했으나 모카는 일라이 브로드가 내민 긴급 구제를 택했다. 브로드의 베일아웃은 5년 동안 전시비용 1,500만달러에 매칭펀드 1,500만달러 등 총 3,000만달러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잠시 회생하는 듯했던 모카는 그러나 2010년 새 관장으로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를 맞아들인 후 다시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다이치는 비영리 예술단체 경력이 전무한 뉴욕의 아트딜러 출신으로, 장사 수완과 모험적 전시 유치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미술관 관장으로서는 자격미달에다 이해충돌이 있다는 의견이 분분해 영입 때부터 논란이 심했다.
그런 그가 모카에 들어온 후 큐레이터들 및 이사들과 충돌을 빚으며 스태프들을 계속 갈아치우더니 급기야 지난해 7월 예술계의 신망이 두터운 수석 큐레이터 폴 쉬멜(Paul Shimmel)을 쫓아내면서 내분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모카의 기둥이었던 쉬멜이 떠나자 이사들도 하나둘이 아니라 우르르 모카를 떠났다. 특히 아티스트 이사 4명(존 발데사리, 캐더린 오피, 바바라 크루거, 에드 루샤)이 한꺼번에 떠난 것은 대지진과 같은 재난이었다.
모카는 다른 미술관들과는 달리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태동됐으며, 이들 4명이 이사직을 유지하면서 모카의 정신을 구현해온 독특한 뮤지엄이었기 때문이다. LA타임스는 그때도 연일 이 사태를 보도하며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진 일라이 브로드에게 다이치를 해고하라는 압력을 강력하게 넣었지만 브로드는 모른 척했고 다이치는 자리를 보전했다.
문제는 브로드의 구제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이 전혀 호전되지 않은 것으로, 모카는 지난해 12월엔 USC와 파트너십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또 한 번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이번에 라크마의 인수 오퍼가 나온 후 또 밝혀진 바로는 워싱턴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과도 파트너십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기관과의 파트너십 제의는 바로 일라이 브로드가 시작했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갈수록 유치하고 흥미로워진다.
브로드는 왜 라크마의 오퍼를 무시하고 다른 기관들과의 공조체제를 추진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 라크마 관장의 야심찬 확장계획에 브로드가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고반을 싫어하고 견제하는 브로드로서는 그가 일격에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가진 모카를 집어삼켜 문화예술계의 영웅이 되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모카는 1945년 이후의 컨템퍼러리 아트를 집중 구입해 전 세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6,000여점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한편 라크마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전 시대에 걸친 미술품 10만여점을 갖고 있는데 컨템퍼러리는 약하기 때문에 두 기관이 합치면 환상적인 컬렉션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반과 브로드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고도 단순한데, 한마디로 파워 싸움이고 기 싸움이며 누가 LA 예술계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명사 인가를 놓고 벌이는 승부게임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심술을 부리는 쪽은 돈과 미술품이 막강하게 많은 브로드라 할 수 있다.
유명한 아트 컬렉터로 수천점의 보석 같은 컨템퍼러리 아트를 소유하고 있는 브로드는 7년 전 고반이 관장으로 부임하기 전만해도 라크마에 자기 기부금(5,600만달러)으로 건축 중이던 브로드 미술관(BCAM)이 오픈하면 그의 컬렉션을 기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고반이 온 후 얼마 안 있어 기증의사를 철회했고, 결국 다운타운 모카와 디즈니 콘서트홀 바로 건너편에 자기 이름을 딴 뮤지엄 ‘더 브로드’(2014년 개관 예정)를 짓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또 2008년 모카의 긴급구제 당시 라크마의 향후 인수시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사들이 반경 100마일 이내 로컬 뮤지엄과의 합병을 심플한 투표절차로 결정할 수 없도록 베일아웃 조건을 명시해 놓았다. 따라서 이번에 모카 운영진이 라크마의 오퍼를 받아들이고 싶다 해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절차상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고반은 야심가이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펀드레이징, 인간관계, 아트에 대한 식견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관장업무를 수행해온 그의 부임 후 라크마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연 관람객 숫자가 거의 두 배로 늘었다. 2개의 전시관(브로드 미술관과 레스닉 파빌리온)이 새로 들어섰고, 윌셔가에 세워진 크리스 버든의 ‘시티 라잇’은 LA 명소가 됐으며, 북쪽 캠퍼스에는 지난해 화제를 뿌리며 옮겨다 놓은 마이클 하이저의 ‘공중에 뜬 돌덩어리’까지 설치돼 이제 라크마는 LA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러보는 뮤지엄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할리웃 스타들까지 포섭, 영화박물관 건축에 힘을 쏟고 있으니 LA가 그를 가진 건 크나큰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모카는 어디로 갈까? LA타임스는 16일자 기사에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와의 5년 파트너십은 말도 안 되는 빈껍데기 딜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 파트너십은 재정후원 없이 인력과 소장품 대여, 프로그램 공조에 국한돼 있는데, 지역적으로도 서부와 동부 끝에 위치하고 있어 공조가 어렵지만 가장 현대적인 미술관에 가장 전통적이고 관료적인 미술관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지금 모카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관장과 이사회라며 다이치와 브로드를 싸잡아 성토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모카가 재정적 안정을 얻고 전처럼 독립적인 미술관으로 운영되는 것이라고 예술계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라크마와의 합병도 좋지만 두 기관의 비전이 확연히 다르고, 전시 및 운영 스타일도 다르기 때문에 LA를 위해서는 다른 개성을 가진 미술관이 공존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다. 결국 돈이 문제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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