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러 지폐에 새겨진 제퍼슨 대통령은
프랑스로부터 영토를 사들여 거의 2배로 확장
미국의 시중 지폐 단위는 10진법에 의한 것인데, 예외적으로 2달러권과 20달러권이 있다. 특히 2달러권은 시중 유통량이 적으므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수량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2달러권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지갑에 넣고선 잘 사용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2달러짜리는 1862년 의회의 결의에 의해서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2달러 지폐를 많이 쓰면 1달러 지폐량을 줄여도 된다는 경제적인 장점을 사서 의회에서 유통 결의를 한 것이다.
실용성이 없어서 정부에서 1966년부터 인쇄를 더이상 하지 않다가 10년후인 1976년에 다시 인쇄를 시작하였다. 지폐의 앞면 그림은 한때는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라던가 당시의 정부 재무관의 초상화 또는 교육적인 그림 등 일정치가 않았는데, 1918년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초상화로 고정을 하였으며 이면에는 ‘John Trumbull’이라는 독립전쟁 당시의 화가가 그린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라는 제목의 그림을 축소 복사한 것을 실었다.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1743년4월~1826년7월)은 사우스 다코다주 Pennington County의 Rushmore 돌산에 새겨진 4인의 대통령 흉상 중의 한 사람이다. 미국 여론조사에서 내내 미국 5대 대통령 중의 한사람으로 자리를 굳힌 훌륭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혁명 전쟁 중에 선포한 ‘미합중국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기초한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지금의 미국 민주주의의 사상적인 기틀은 바로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에서 읊은 인간의 기본적 인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독립선언서는 기본적 인권과 혁명권에 관한 前文, 영국 국왕과 영국의회, 영국인들의 식민지에 대한 부당한 압박과 악정에 관한 28개조항, 그리고 독립을 선언하는 결론 등 3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전문 부분을 발취해보면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그들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된다는 것…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제퍼슨은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College of William & Mary’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했다. 그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774년 영국에서 식민지를 괴롭히는 여러가지 악법을 만들자 그는 반대 결의문을 만들어서 출판하는 등 반영활동을 하였다.
초기에는 그러한 악법의 합법성 등을 문제로 하였으나 나중에는 식민지 주민은 자신들이 스스로 통치할 ‘자연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영국 의회는 영국 본국의 의회이며 식민지의 법을 입법할 권한이 없으며 국왕은 국민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미국 민주주의를 성숙케 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독립 후 1785년 5월에는 주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789년 9월 귀임할 때까지 유럽열강에게 미국을 올바로 인식 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귀임 후인 1790년 3월에는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 미국 최초의 국무장관직을 맡아서 건국시조로서 정부위 기틀을 잡는데 공헌 하였다.
재임 중에는 재무장관이던 해밀턴과 의견 충돌이 많았다. 워싱턴이나 해밀턴 지지자들은 강한 연방정부를 구상하고 있었고 제퍼슨은 주의 권한신장을 주도하였다. 서로 화합이 잘 안되므로 민주공화당을 창당, 해밀턴의 연방당과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제퍼손과 워싱턴은 거의 우정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797년에는 대통령으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여 신임대통령인 존 아담스 밑에서 부통령으로 봉직을 했다. 180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무난히 당선,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고 연임까지 해서 1809년까지 봉직을 했다. 재임 중에는 루이지아나 매수와 루이스ㆍ크라아크 탐사팀을 편성, 태평양 연안까지 환경 탐사를 시킨 공이 크다.
1803년에 제퍼슨은 본인의 변호사 제자이며 후일 제5대 대통령으로 국제 정치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주었으며 한때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바 있는 제임스 몬로와 미국 건국시조의 일원이며 주프랑스 미국 대사로 있던 로버트 리빙스턴에게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아나 지역의 뉴오링스시를 구매, 교섭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는데,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부족한 전쟁 자금을 보충할 요량으로 루이지아나 지역을 모두 매도하겠다고 하여 당시 화폐 1500만달러로 매입을 하였다. 그 당시의 미국영토를 2배로 늘린 것이다. 현 미국영토의 23%에 해당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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