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권에 새겨진 워싱턴 대통령은 독립전쟁의 영웅이요 미국의 국부
$1권에는 “미국 국부(國父)”이며 국가 영웅으로 존대를 받고 있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화가 새겨져있다. 영국에서 이민와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부모 밑에 태어나 비교적 부유하게 잘아났다. 11세때 아버지를 게 되자 형 로렌스는 아버지 역할을 떠맡으며, 상속받은 농원을 마운트 버논(Mout Vernon)이라고 명명하고 사업에 열중하였다.
워싱턴은 마운트 버논에서 로렌스형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을 하였다. 로렌스는 버지니아 식민지 민병대(militia) 대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1752년 타계했다. 워싱턴은 농원을 상속받음과 동시에 4개 부대로 구성된 민병대의 1개부대장직을 맡으며 소령으로 임명됐다.
당시는 영국의 미국식민지 13개가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시대여서 국군은 없었고 식민지마다 자체 치안을 위해 민병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은 원래 측량에 흥미가 있어서 측량 공부를 했는데, 민병대 군인으로 입적하면서 군인생활에 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1754년에 워싱턴은 대령으로 승진을 했고, 그해 버지니아 주지사의 명령에 따라 오하이오(Ohio)게곡에서 불란서 군인을 수명 살해한 것이 단서가 되어 그 사건은 프랜치-인디안 전쟁(French & Indian War, 1755~1763)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현 캐나다와 미국 중부일대를 영유하고 식민 정책을 폈는데, 인디안들과 대립을 하지 않고 도리어 협조하면서 통치했다. 이 전쟁 이름도 프랑스군과 그리고 프랑스군과 연합체를 이루던 인디안 부족들을 상대로하는 전쟁이라고 해서 붙혀진 것이다. 워싱턴은 이 전쟁에 참전했고 1758년에 현역에서 물러나 16년간 마운트 버논 농장에서 농원주(農園主)로 그리고 정치가로서 활동을 한다. 1769년부터는 그간 불거진 식민지의 반영국운동(反英國運動)의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74년 버지니아식민지 페어팩스 카운티(Fairfax County) 의회에서 버지니아 정치집회(Virginia Convention)에 제의할 안건과 주장을 담은 결의문에 모든 식민지 대표들이 참석하는 의회를 만들자는 내용이 있었다. 이 의회를 Continental Congress(대륙회의)라고 한다. 워싱턴은 1774년 7월에 버지니아 정치집회를 주재하면서 페어팩스 카운티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그는 제1회 대륙회의버지니아 대표로 참여를 했다.
이 대륙회의는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악법을 철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과,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었다. 1776년 토마스 페인(Thomas Pane)이 독립된 공화제 정부수립을 역설한 『커먼 쎈스(Common Sence』라는 소책자가 시중에 퍼지면서 대륙회의도 미국 독립을 쟁취하자는 쪽으로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1775년 4월 보스턴 북서부에 위치한 콩커드(Concord) 소재 민병대의 무기고와 보급창을 영국군이 파괴 작전을 전개 했는데 여기서 민병은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전술적으로 유리했으며 중천한 사기(士氣) 탓으로 영국 정규군과 대등한 수준으로 전투를 벌여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 냈다. 이 전투에서 민병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워싱턴은 4발의 적탄이 본인의 외투를 관통했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장병을 성공적으로 지휘 통솔하였다. 이 전투를 Battle of Lexington Concord라고 하며 독립전쟁을 이끌어낸 첫 전투로 꼽는다.
워싱턴은 이 전투 후에 있은 제2차대륙회의에서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군복차림으로 출석했다. 동년 6월 15일에 잇은 피라델피아 대륙회의에서 “식민지군총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Continental Army)”으로 임명이 되었고 7월 3일 취임을 했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공표한 날은 워싱턴이 취임한지 만1년 후인 1776년 7월 4일이다.
미국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후원과 참전이 큰 힘이 되었다. 워싱턴은 1781년 10월 17일 버지니아주 요크타운(Yorktown) 에서 영국군주력을 포위하고 공격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투로 독립전쟁은 일단 종료되고 1783년 9월 파리 평화협상회의에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전투가 종료된 후인 1781년 11월 2일 워싱턴은 대륙군을 해체하고 군대와 이별했다. 1789년 2월 4일 미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각주에서 선발된 선거인단 모임에서 만장일치로 워싱턴이 선출이 되었고 1792년 중임때도 동일한 표수로 재선이 도었다.
워싱턴은 2선임기를 마치고 난 다음 주위에서 계속해서 3선출마를 요청했으나 사양하고 미국 대통령직은 2선이상은 안된다는 예를 남겨놓았다. 미국대통령 선거의 특징인 선거인단도 이때에 생긴 제도이다. 워싱턴은 당시의 재무장관인 하밀턴과 같이 강력한 연방제를 주장하였다. 개인에 관한 일화인데, 그는 악수는 대통령의 체면손상이 된다고 해서 재직중에는 악수를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운명하기전 병석에 누워 유언을 하였는데, 본인 사후에 본인 농장에서 거느리고 있던 수백명의 흑인 노예를 모두 석방 해 주라고 간청해 사후 부인이 실천을 했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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