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설이어서 역사에 남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명연설로 만드는 것이다” - 역사학자 H.W. 브랜즈는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인가는 시대상황과 함께 스피치에 담긴 정책의 실현 여부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1941년 1월6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명분을 인간의 기본자유 수호라고 역설했다 :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 이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는 그후 화가 노먼 로크웰이 이를 주제로 그린 4개의 연작그림에 의해 국민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면서 전쟁 중 미국의 좌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인권선언 작성에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지 두 달이 채 안된 1964년 1월8일 첫 국정연설을 하게 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가 시작한 사회복지계획을 적극 추진하며 ‘빈곤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 “오늘 이 행정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적 선전포고를 한다” 그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위대한 사회’ 정책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비롯한 다양한 복지플랜의 입법화 성과를 거두었다.
국정연설은 보통 대통령이 의회에 보내는 ‘세탁물 목록(laundry list)’으로 불린다. 앞으로 한해 대통령이 추진할 과제들을 나열하다보면 취임연설과는 달리 감동적일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대통령에겐 최고의 무대에서 최다의 청중에게 자신의 통치방향을 제시하는 강력한 연단이다. 정치 환경에 따라 의회를 향한 읍소일 때도 있고 경고 내지 선전포고를 담을 수도 있다.
집권2기에 들어선 오바마 대통령에겐 이번이 5번째 국정연설이다.
2009년 취임 몇 주후에 행했던 첫 번째는 아직 국정(state of union)을 잘 모르는 신임이어서 ‘국정연설’ 아닌 의회연설로 불렸다. 경제위기에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 “미국은 다시 강해질 것”이라며 회복을 약속한 연설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연설 후 여론조사에서 52%가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답했다.
2010년 국정연설의 주제는 취임 후 올인해온 헬스케어개혁 통과 촉구였으며 두 달 후 의회통과와 함께 서명, 입법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고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2011년의 국정연설에서 오바마는 공화당을 향해 “미래를 미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초당적 단합을 호소했다. 초당적 합의는커녕 더욱 양극화된 대립 속에서 맞은 선거의 해 2012년, 오바마의 국정연설은 공정한 경제사회 실현을 위해 부자증세를 제안하며 ‘중산층의 수호자’임을 강조한 캠페인 스피치였다.
12일 오바마는 2013년 국정연설을 통해 야심찬 2기의 청사진을 공개했다. 2014년의 중간선거와 2016년의 차기대선을 감안하면 오바마에겐 가장 비중 있는 국정연설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눈에 번쩍 뜨이게 새로운 아이디어도,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감동적인 구절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일관되게 강조해온 그의 통치철학을 재확인시켜주는 어젠다들은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중산층을 일으키고 빈곤층을 끌어 올리는 공정한 경제사회 실현에서부터 이민과 총기규제, 기후변화와 선거법 개선, 북한의 핵위협과 아프간전쟁, 중동평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여론에 호소하고 의회를 압박했다.
중심 어젠다는 경제였다.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위한 다양한 정책을 제시했다. 다리와 도로 등 기간시설을 신축·보수하고, 조기교육을 확대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며,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고, 일자리 창출과 기술교육을 위해 민관 파트너십을 개발하며…그러나 보수언론 월스트릿저널은 “다이어트를 해야하는 운동권 대통령”이라고 비유했다. 적자예산에 시달리는 대통령에겐 야심찬 어젠다를 위해 쓸 수 있는 돈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웅변 뒤의 냉엄한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오바마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자신의 정책은 한푼의 적자도 늘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오바마는 이렇게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정부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폭넓은 성장을 위해 투자하는 더 스마트한 정부다” 클린턴이 “큰 정부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한 후 17년 동안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심해온 민주당에게 보수가 지향하는 작은 정부와 진보가 선호하는 뉴딜 정부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해답을 제시한 셈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분석했다.
이날 연설의 감성적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가서 총기문제를 언급할 때였다. 총기규제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오바마는 이슈자체를 회피하려는 의원들을 향해 “반대하고 싶다면 그것도 당신들 선택”이라고 전제하며 어쨌든 표결을 하라고 촉구했다. 참석한 총기폭력 생존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을 차례차례 호명하며 이들은 모두 의원들에게 표결투표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뜻의 “They deserve a vote”를 5차례 반복할 때마다 의사당은 감동의 박수갈채로 넘쳐났다.
입법화에 앞서 표결을 촉구할 정도로 기대치를 낮춘 총기규제법은 한껏 약화시켜 신원조회 확대만으로 축소한다 해도 성사여부가 불확실하다. 오바마가 여유있게 “몇 달 안에 통과시키자”고 격려한 이민개혁을 제외하곤 이날 제시된 대부분 정책의 실현은 지금으로선 난망이다.
오바마 2기의 전망이 그렇다고 아주 흐림만은 아니다. ‘스마트한 정부’가 스마트하게 돌아가는 한편에서 포괄적 이민개혁이 성사되고,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지금은 월스트릿만 누리고 있는 경기회복이 메인스트릿에서도 감지된다면 오바마의 2기 청사진은 한참 후에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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