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은 아마도 역대 대통령들을 제외하곤 가장 많이 여론조사의 대상에 올랐던 미국인일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선거분석가 네이트 실버가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추려낸 힐러리 호감도 측정 주요 여론조사만도 500개에 이른다.
퍼스트레이디, 연방 상원의원,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 국무장관을 역임해온 20년 동안 힐러리에 대한 호감도는 등락을 거듭했다. 백악관 시절 탄핵 직전까지 치달은 남편의 바람기에도 의연하게 곁을 지키며 60%가 넘는 여론의 응원을 받기도 했고, 오바마와 막판 비방전을 벌이던 2008년 초여름엔 비호감도가 50% 가까이 치솟은 적도 있었다. 경선의 라이벌 오바마의 각료로 충성을 다한 최근 4년간은 60% 이상의 높은 지지도를 꾸준히 유지해오고 있다.
2월1일 힐러리가 국무장관 직을 마치고 물러났다. 조용히 떠나는 다른 장관들과 달리 고별 연설은 물론, 이임장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전국의 미디어가 호들갑스럽게 조명한 ‘화려한 퇴장’이었다.
112개국을 순방한 그의 외교업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는 ‘스마트 외교’를 펼치며 여성과 인권 등 인도적 어젠다를 부각시킨 ‘위대한 국무장관’이라는 찬사도 나왔지만 오바마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훌륭한 팀플레이어’ 정도라며 무난한 B학점을 준 외교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힐러리가 가는 곳마다 연예인 못지않게 환호와 각광을 받은 ‘록스타 장관’이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취임 첫해 해외순방에 동행했던 한 참모는 “마돈나와 함께 여행하는 듯했다”며 감탄을 거듭했다.
힐러리 본인은 우선 20년간 부족했던 잠을 실컷 자고 싶다면서 공직 복귀 의사는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의 지난 주 ‘퇴장’을 ‘은퇴’로 보는 시각은 드물다.
“힐러리 클린턴, 2016년에 출마할 것인가?”는 지난 연말부터 미 정가의 최대 화두 중 하나다.
아직 4년이나 남았는데 너무 성급한 관심이라는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빌 클린턴도, 버락 오바마도 선거 4년 전에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의외의 뉴페이스였으니까. 그러나 한 선거가 끝나면 다음 선거가 시작되는 캠페인 정치의 본질적 측면에서 보면 절대 시기상조가 아니라는 주장이 더 우세하다.
게다가 민주당에게 힐러리는 놓칠 수 없는 막강 후보다. 높은 지지도와 함께 현재 거론되는 양당의 어떤 후보보다 경력과 능력, 모금 네트웍과 참모진을 갖추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가장 인기 있는 전직대통령인 남편과 뜨겁게 열광하는 충성스런 ‘여성표밭’이라는 든든한 지원군도 있다.
힐러리가 출마해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하면 민주당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오바마 2연승에 이어 3연승이라는 꿈을 실현하게 된다. 단순한 승리를 넘어 공화당에게 재기를 더욱 힘들게 하는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의 링컨 미첼교수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백인표의 이동을 든다. 오바마가 구축해놓은 소수계 연합표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백인표의 상당부분을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힐러리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백인여성표는 물론, 백인남성표도 오바마보다는 훨씬 더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백인표의 분산은 공화당의 유일한 버팀목이 흔들린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 민주당 내부에서 “런, 힐러리, 런!”이라고 외치는 출마 재촉이 그칠 리 없다.
미국에서 가장 스마트한 ‘정치커플’로 꼽히는 클린턴 부부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USA투데이의 창간인 앨 뉴하스는 “이미 빌과 힐러리는 막후에서 차기 대선 준비를 시작했을 것”이라면서 “69세? 나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첫 여성 대통령이 나올 시기이며 그 적임자는 힐러리”라고 강조한다.
지금쯤 강아지와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힐러리로서도 결정을 너무 오래 끌 수는 없는 입장이다. 힐러리 말고도 민주당 차기대선 예비주자들은 많다. 조 바이든 부통령,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 마틴 오말리 메릴랜드 주지사…그러나 이들은 힐러리가 움직여야 움직일 수 있다. 쿠오모나 오말리가 큰손 기부가들과 접촉했을 때 그들이 묻는 첫 마디는 “힐러리는?”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민주당내 지지도가 무려 82%인 힐러리가 의사를 밝힐 때까진 선거판은 동결상태인 셈인데 정작 본인이 계속 시간만 끈다면 손발 묶인 다른 후보들에게 ‘민폐’ 원성 듣기 십상이다.
물론 힐러리의 전망도 온통 장밋빛은 아니다. 지지율은 출마를 결심한 순간부터 당연히 하락할 것이며 공직에서 떠난 앞으로 4년 공백기에 여론의 관심유지도 쉽지 않을 것이다. 69세 나이는 어떻게 포장해도 부담스러울 것이며 다시 패배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힐러리 유산’은 상당부분 빛을 잃을 것이다. 출마에 따르는 위험부담이다.
힐러리 붐인지, 힐러리 거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힐러리의 대권 재도전을 위한 무드엔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힐러리를 위한 준비”라는 수퍼팩도 설립되었고 새 홈페이지도 개설되었다. 힐러리 측근도 아니면서 수퍼팩을 설립한 여성 지지자는 “힐러리가 출마할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도 힐러리를 도울 준비를 되어있을 것이다”이라고 말한다.
힐러리의 결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던 자신들의 대변자로 힐러리를 충실하게 지지하며, 2008년 1,800만개의 금을 그어놓고도 깨지 못했던 유리천장을 이번에는 꼭 깨자고 다짐하는 힐러리 군단이다.
4년 전 눈앞에서 놓쳐버렸던 ‘첫 여성대통령 탄생’의 꿈이 다시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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