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화 카톡에 뜨는 프로필 사진을 보고 같이 있는 남자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작년 여름 할리웃 보울에서 구스타보 두다멜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내가 워낙 그의 팬이다 보니 아들 사진, 강아지 사진을 제쳐놓고 올린 것이다.
LA의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이 모두 그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도 두다멜의 연주를 무한애정을 갖고 듣는다.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공연장 전체로 퍼져나가는 찬란한 빛과 힘찬 에너지, 그 열정 덩어리의 음악에는 누구라도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 만나보면 어찌나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지,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LA필 단원들이 모두 껌뻑 넘어가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내가 그를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지휘자는 박자만 젓는거 같은데 왜 그렇게 중요하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를 안 보고 악보만 보던데 도대체 지휘자가 하는 일이 뭔가, 좋은 지휘자는 폼이 멋있어야 되는건가…
지휘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지휘자의 수준에서 멈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리 명연주자들을 모아놓아도 지휘자가 형편없으면 연주가 형편없고, 아마추어들을 데리고도 세계 수준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지휘자의 역량이다.
지휘자는 악보에 적힌 음표들을 불러내 생명을 불어넣고 음악을 빚어내는 제2의 창조자다. 악보는 물론 작곡가가 썼지만 소리없는 악보를 눈으로 보고 머리로 해석하여 음악을 만들어 들려주는 일은 지휘자가 하는 것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악보 자체는 음악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 말이다.
곡의 템포와 강약, 분위기와 감정표현, 악기들의 음색조절과 강조부분 등 모든 해석이 전적으로 지휘자의 몫이고, 그에 맞춰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와 함께 세부사항까지 연습하여 호흡을 맞추게 되며, 그런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오르면 청중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지휘자가 한 일의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원들은 굳이 지휘자를 쳐다보지 않아도 일사불란하게 연주할 수 있고, 지휘자의 폼이나 몸짓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란 얘기다.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음악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만천하에 증명하며 근대 지휘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19세기말 빈 궁정오페라의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다. 그 이전에는 지휘자 없이 콘서트매스터의 큐에 따라 연주가 시작되거나, 지휘자가 있다 해도 그야말로 박자 젓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지휘에나 작곡에나 완벽주의자였던 말러는 자기 작품의 악보마다 아주 상세한 지시사항을 적어놓았지만 연주속도에 관해서는 무한한 자유를 허용, 지휘자에 따라 같은 교향곡이라도 연주시간이 10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누구의 말러 2번인가, 누구의 베토벤 9번인가, 누구의 부르크너 7번인가 하고 지휘자를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최고로 꼽히는 베를린 필조차 같은 곡을 카라얀이 지휘했을 때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했을 때가 다른 것이 좋은 예다.
LA필하모닉은 93년 역사 동안 11명의 지휘자를 맞았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오케스트라로 변신을 거듭해 오늘의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되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안드레 프레빈, 주빈 메타를 거쳐 17년이나 상임지휘자로 활약한 에사 페카 살로넨은 LA필을 정금같이 조련,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리스트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그런데 그가 떠난 지 불과 2년도 안 됐을 때 음악전문가들은 LA필의 사운드가 두다멜의 바톤 아래 완전히 달라졌다며 큰 놀라움을 표시했다. 두다멜 취임 2년후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을 때는 현지 비평가들로부터 ‘전혀 다른 LA필이 왔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이것은 더 나빠졌다거나 좋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주 스타일이 변했다는 뜻이다. 나의 개인적인 감상으론 살로넨은 템포가 약간 빠르면서 날카롭고 냉철하며 세련된 사운드를 내는 반면 두다멜은 약간 느리지만 깊고 풍성하고 격정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지휘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똑같은 곡을 여러 사람이 지휘한 것으로 비교 감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가 있으니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두다멜과 함께 찍은 카톡 사진은 곧 바꿔야 될 것 같다. 내가 너무 못 나온데다, 볼 사람들은 이미 다 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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