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선진영이 꾸려지던 무렵, 200명 브레인을 망라한 경제자문그룹의 정책 기조는 위험수위로 치닫는 저성장을 극복할 근본적 비전 제시 쪽이었다고 한다. “세금 줄이고 규제 푸는” 보수의 전통적 방향에 제동을 건 것은 한 연구소와 실시한 대규모 서베이의 결과였다. ‘민생’이 빠진 경제공약은 ‘필패’의 지름길이었다. 이때부터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민생’이라는 전통적 야권 어젠다는 아직 야권 후보의 윤곽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보수의 주자에게 선점 당했다.
보수층을 총 결집시키면서도 진보적 어젠다를 끌어안은 박근혜 진영의 민심읽기는 빗나가지 않았다. 2012년 12월19일 한국의 유권자들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 보다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나라”를 선택했다.
돌봐야 할 가족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는 자신에겐 “국민여러분이 가족이고 국민의 행복만이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라고 강조해온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들은 쉬운 언어로 서민들에게도 친근하게 손 내민 내용들이었지만 실현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약속 대통령’을 천명한 그에게도 상당부분 실현이 불가능할 것이다.
최근 출간된 이코노미스트지 한국특파원 대니얼 튜더의 신간 제목은 ‘코리아:불가능의 나라’다. 임퍼서블 컨트리? 튜더는 제목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설명했다.
하나는 이미 세계가 다 알고 있듯이 단기간에 최빈국에서 14위 부국으로 고속 성장한 ‘불가능’의 실현이다. 다른 하나는 “불가능한 목표의 연속인 현재 한국 젊은이들의 삶”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결혼…태어나는 순간부터 시험과 시련의 관문을 거쳐야하는 “어느 면으로는 라이프가 불가능한” 사회라는 뜻이다.
한 재미 경제학자도 현재 한국에선 “모든 사람의 기대치가 자신의 능력보다 너무 높다”고 지적한다.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에 좌절하며 삶의 기준이 “할 수 있는 가”가 아닌 “하고 싶다”라는 것이어서 현실적 경제정책이 발붙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는 이번 선거의 키워드였지만 과연 어디까지 실현 가능할 것인가. 100조원이 넘는 복지의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경제성장과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재벌규제의 수준은 어느 선인가. 박근혜 당선인이 직면한 현실은 국내 경제만이 아니다. 미·중·일과 얽혀있는 대북관계부터 국제적 난제도 산적해 있다.
‘희망적 내일’에 대한 약속을 말해온 ‘당선 전’에서 이제 국민들에게 ‘비관적 현실’을 인식시키고 인내와 희생을 설득해야할 ‘당선 후’ 단계로 들어 선 것이다. 민심은 변덕스럽지만 최선으로 택했건, 차선으로 택했건, 차악으로 택했건 그에게 표를 준 52%는 당분간은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고 성원도 보낼 것이다. 나머지 48%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얻는 호소 없이는 또 하나의 핵심공약인 ‘국민 대통합’뿐 아니라 합리적 경제정책 시행조차 힘들 것이다.
2008년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던 오바마도 당선 스피치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47%를 향해 진심으로 호소했었다. “우리의 갈 길은 멀고 험합니다. 난 여러분의 표를 얻지 못했지만 여러분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내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여러분의 대통령도 될 것입니다”
이번 박근혜의 승리는 몇 가지 한국 신기록을 낳았다 : 첫 여성대통령, 첫 부녀대통령, 첫 독신대통령에 더해 헌정사상 최다 득표 대통령, 1987년 직선제 이후 첫 과반득표 대통령…상당수 해외언론들의 시각은 한마디로 표현된다 - “독재자의 딸에서 한국 첫 여성대통령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유산을 가장 큰 자산으로 당선된 그에겐 ‘첫 부녀대통령’이란 타이틀이 지금은 ‘첫 여성대통령’보다 어울린다. 극심한 남녀불평등을 겪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여성지위 향상의 ‘상징’으로 어필하기는 아직 힘들다. 차별을 딛고 유리천장을 깨며 정상에 오른 것도 아니고 의정생활 15년 동안 차별 폐지를 위해 노력한 흔적도 별로 없다.
그러나 캠페인 중반 무렵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구호로 추가하면서 제시한 ‘여성행복 3대 플랜·6대 과제’를 임기 중 진지하게 시도한다면 경제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여성인력 확보의 물꼬를 튼 진정한 ‘첫 여성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수첩공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수첩을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과외수첩이었을 때 열심히 귀 기울이며 공부하던 초심을 간직하고, 여론수첩과 민원수첩이 되었을 때 민심을 돌보던 자세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정치자산의 하나로 국민의 신뢰를 꼽는다. 수많은 정적들 속에서도 국민의 절대적 믿음을 무기로 대공황을 극복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을 하던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순수한 동기”였다고 한다.5년 후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날, 자신이 ‘유일한 가족’이라고 공표한 국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송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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