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네 집은 사방에 참나무 숲이 우거져 마치 산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그애네 주방에서 싱크대 앞에 서면 멀리 산자락 가운데 하얀 집이 한채 보인다. 한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다가 나무 잎이 떨어지는 늦가을이 오면 그 집은 나즈막한 산을 배경으로 마치 한폭의 풍경화처럼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십 대이던 시절,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지독한 가난을 겪던 무렵, 내게 언덕 위에 하얀 집은 꿈의 상징이요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함께 대학을 졸업했던 가까운 친구들이 독일이나 이태리 같은 나라로 유학을 간 후 그들은 심심찮게 내게 외국의 엽서들을 보내곤 했다.
그 엽서에는 강이나 산을 끼고 지붕이 파랗고 벽이 하얀 아름다운 집들이 있었고 그 집들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요 손이 닿지 않는 머나먼 꿈나라 속의 신기루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수년 후 나는 미국이라는 신천지에 왔고 어느날 부터인가 그 언덕 위 하얀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작 그 신기루를 붙잡았다는 고마움이나 감사함을 잊고 당연하다는듯이 오랜 세월을 살았고, 그것도 이젠 또 세월이 한참 지나서 옛이야기처럼 한낮 과거의 기억 속에 묻혀 버렸다.
이제는 내가 미국에서 첫번째 장만했던 작은 타운 하우스보다 더 작은 방 두개짜리 집에서 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잠에서 깨어남을 감사하고, 건강하게 걷고 운동하고 친구들과 함께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쓸데 없는 수다를 떨 수 있음을 감사한다.
이곳 라스모어라는 특정 지역에서 만나 마지막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들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정이 가고 소중하다. 우리들은 자주 만나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고 함께 성경공부도 하고 몇명은 함께 교회도 간다.
어느 유명한 의사가 말하기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커튼을 제치며 적어도 네개 이상의 전화번호를 암기하고, 하루에 몇 시간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를 포함해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다. 한때는 저마다 언덕 위에 하얀 집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행복은 집의 사이즈나 크기에 있지 않고 모두 저마다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젊었을 때는 미처 몰랐다.
늙으면 불행하고 늙음 자체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젊음은 싱그럽고 푸르러 눈부신 시절이지만, 욕심 때문에 번민이 따랐고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 때문에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하고 더 편하다. 이래서 인생은 공평한 것인가 보다.
내가 처음 장만한 타운 하우스는 내가 꿈꾸던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집을 장만하고 한국에 오년이란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던 우리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식구들이 모여 함께 맞이했던 그 성탄절이 내 생애에서 제일 기뻤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거실 한쪽에서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츄리와 그 밑에 쌓여 있던 네 아이들의 선물들과 아이들이 즐겁게 떠들며 웃었던 그 왁자지끌 했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몇년 후 내가 귀국했을 때 내 친구들은 내가 성공했다고들 했다. 그때 그들이 말한 성공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 중에 나와 제일 가깝게 지냈던 대학 시절의 단짝이 한강 맨션에 살고 있어서 모든 동창들이 그애를 부러워 했다.
이제 그애는 사십을 조금 넘기고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그애의 금쪽 같은 자식들은 무일푼으로 고생을 한다는 얘기를 풍문에 듣고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한편의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일찌기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일찍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알 수가 있다. 처음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애들이 의외로 대기만성이라고 늦게 잘되는 수가 많이 있다.
우리 큰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마음대로 미군에 입대해 한국으로 가버려 제대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해 처음엔 내 속을 많이 썩였지만, 오히려 늦게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서 이젠 대학을 나온 제 형제들보다 오히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한국에서 만난 우리 며느리와도 지금껏 잉꼬부부다. 우리 딸이 나처럼 첫번 결혼에 실패하고 달랑 아이 하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도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우리 딸을 믿었다. 그 믿음대로 우리 딸은 지금 가장 행복하다. 귀여운 손자 손녀를 더 얻었다.
주위에서 결혼에 실패한 딸을 둔 친구가 상심해서 어느날 내게 물었다. 어디 가면 좋은 새 남자를 만날 수 있느냐고.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특정한 곳에 좋은 남자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딸이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라”고.
우리가 한평생을 살때 언덕 위의 하얀집은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 그 집을 가졌다 해도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어느날 그 하얀집이 사라졌다 해도 더욱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어지는 날까지 그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늘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그리움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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