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야구 국제화의 선구자이자 살아있는 역사인 박찬호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커리어 전성기를 보냈다.
‘코리안 특급’이 마침내 종착역에 도착했다.
29일(LA시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한 박찬호(39)는 LPGA투어의 박세리, PGA투어의 최경주와 함께 한국 스포츠의 국제화를 선도한 선구자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곧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역사다. 과연 한국선수가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뛰는 것이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던 시절인 1994년 태평양을 건너와 전격적으로 LA 다저스와 계약하고 단신으로 도전에 나선 이후 2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박찬호 이름 석자는 한인들에게 희망과 기쁨, 자부심을 안겨준 존재였다. 특히 한국이 90년대말 외환위기를 맞으며 MI F의 어두운 그늘에서 국가적으로 시름할 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는 박찬호는 한국민들에게 희망이었고 국가적 자존심이었다. 전성기를 지난 뒤 허리부상으로 고전하면서도 메이저리그에서 장수하며 아시아 투수 통산 최다인 124승을 올렸고, 한·미·일 프로야구 무대를 모두 밟으며 도전을 이어갔다. 박찬호의 성공이후 메이저리그 무대에서는 수많은 한인선수들이 진출했으나 아직까지도 박찬호와 버금갈만한 선수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박찬호가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본다.
90년대말 외환위기 때 국민에 희망을 안겨준 국민영웅
빅리그서 124승으로 아시아출신 투수 최다승 기록 수립
통산 2,156이닝 던져 130승113패 2세이브 방어율 4.40
◆볼만 빨랐던 투수에서 빅리그 에이스까지
공주고와 한양대 재학시절 박찬호가 단연 최고의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는 항상 전문가들의 평가에서 동기인 임선동과 조성민에 이어 한국 3번째 투수라고 평가됐다. 제구력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다이아몬드 같은 그의 재능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레이더에 잡혔고 한양대 2학년 재학 중이던 지난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달러에 계약, 역사적인 빅리그 도전에 나섰다.
메이저리그가 당시로 거액의 계약금을 선뜻 안겨준 것이 말해주듯 박찬호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1994년 스프링캠프에서 시속 95마일의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며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메이저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하다 단 두 경기에서 4이닝 5실점한 뒤 마이너리그 더블A 팀으로 보내진 박찬호는 이후 1996년 본격적인 풀타임 빅리거로 우뚝 서기까지 2년간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연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겐 끊임없이 도전하는 뚝심과 성실함이 있었다. 마이너에서 뼈를 깎는 단련의 시간을 거친 박찬호는 1996년 4월7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에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역사적인 한인투수의 메이저리그 첫 승을 따냈다. 결국 2006년 시즌을 5승5패로 마친 박찬호는 이듬해 14승(8패)을 기록하며 두자리수 승리를 따내며 다저스 마운드의 핵으로 떠올랐고 이후 2001년까지 5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2000년에는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 (10패)을 올리고 삼진 217개를 잡아내면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해 최고의 해를 보냈고 이 성적은 1년 뒤 프리에 이전트로 빅딜을 터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상과 시련, 그리고 계속된 도전
박찬호는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달러에 계약하며 선수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최고의 시기에 부상이라는 시련이 닥치면서 부진과 재기를 거듭한 ‘오뚝이 인생’이 시작됐다.
2002년 9승(8패)에 그치면서 주춤한 박찬호는 이듬해 허리 부상의 여파로 고작 7경기에 나와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고, 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남 모르는 부상으로 신음하면서도 박찬호의 좌절없는 도전은 계속됐다. 샌디에고 파드레스로 옮긴 2005년 시즌 12승을 거두며 마침내 자신의 빅리그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이후 2006년 파드레스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매년 팀을 옮겨다녔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꾸준한 기량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2008년 친정팀 다저스에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간계투로 보직을 옮긴 박찬호는 그해 방어율 3.40의 호성적을 올렸고 이듬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뒤 생애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도 누렸다.
그리고 이번엔 첫 우승의 꿈을 좇아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27경기에 나와 2승1패, 방어율 5.60에 그쳤고, 결국 방출된 박찬호는 자칫 소속팀 없이 시즌을 마칠 위기에 몰렸으나 가까스로 피츠버그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잔류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이어리츠에서 통산 124승째를 올려 일본인 투수 히데오 노모(통산 123승)를 제치고 메이저리그의 아시아 출신 선수 통산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1994년 다저스에 입단해 17시즌을 뛰면서 467경기(선발 287경기)에 출전한 끝에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일본 거친 ‘금의환향’…고향에서 행복한 마무리
마지막 목표였던 124승을 달성하고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종착역을 고민하던 박찬호는 2010년 12월 일본진출을 선택했다. 1년간 총 220만 달러에 계약한 박찬호는 그러나 고작 7경기에 출전해 1승5패와 평균자책점 4.29로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2011년 10월 방출 통보를 받았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박찬호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예외 규정을 통해 그를 받아들인 덕에 한국 무대를 밟게 됐다. 일본에서 워낙 성적이 좋지 않았던 터라 실력에 의문 부호가 따라 붙었지만, 박찬호는 메이저리거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은 입증했으나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시즌을 5승10패, 방어율 5.06으로 마친 뒤 고민을 거듭한 끝에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일본, 한국을 거치면서 통산 2,156이닝을 던지며 130승113패 2세이브와 방어율 4.40이 박찬호가 남긴 기록이다. 박찬호는 야구선수로서 원하던 꿈을 모두 이루고 정든 마운드와 행복한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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