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광고의뢰가 있다. 부고(訃告)다. 원래 부고는 예약 못하는 광고다. 세상에 장례날짜를 정해놓고 거기 맞춰 죽는 망자는 없다. 그래서 갑자기 상을 당한 유족들은 묘지구입, 장례식장 임대 등으로 허둥지둥 바빠지지만 그런 경황에도 신문에 부고부터 낸다. 장례식 지난 후의 부고는 버스 떠난 후 손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문부고는 천편일률적이다. 고인의 사망일자, 향년, 유족명단, 장례일정, 연락 전화번호가 전부다. 고인의 생애를 설명하는데 너무 인색하다. 특히 고인이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여성이면 본인 이름 앞에 ‘아무개 회장의 모친’이라거나 ‘아무개 박사의 부인’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일쑤다. 인생퇴출을 알리는 부고에서까지 남편이나 자식의 그늘에 가린다.
미국신문의 부고는 사뭇 다르다. 우표만큼 작은 것도 있고, 큰 것이라도 대개 한국신문 부고의 5분의 1정도지만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차있다. 모두 망자 본인의 얘기다. 생년월일, 부모이름, 학력, 사회경력, 결혼, 자녀관계, 취미생활, 사망경위 등을 자서전처럼 엮는다. 사진도 딸린다. 대개 영정이 아닌 평상시 모습이다. 젊었을 때 찍은 사진도 있다.
시애틀타임스 부고면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이름은 자주 보지만 한인 이름은 한 번도 못 봤다. 이민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아 미국 장례문화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한국전 참전용사임을 내세우는 부고는 꽤 많다. 워싱턴대학 법대에서 거의 40년을 가르친 윌리엄 스토벅 교수의 장문의 부고(11월 22일자)도 한국동란 참전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고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주는 “광고도 기사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미국신문을 보면 “부고도 기사”다. 부고판이 매일 게재되고 주말엔 2~3면씩 이어진다. 부고 대필 전문기자들도 있다. 요금도 만만치 않다. 시애틀타임스의 경우 1인치(12 줄)에 평일은 95달러, 일요일은 121달러다. 사진 게재요금(142~181달러)까지 합하면 500달러를 쉽게 상회한다.
명사들의 부음은 대개 유료 부고면이 아닌 정규 뉴스면에 보도된다. ‘오비추어리(obituary, 부음기사)’로 불린다. 통일교의 문선명 목사가 지난 9월3일 한국에서 92세로 사망하자 지구촌의 모든 신문이 즉각 그의 오비추어리를 게재했다. 김일성(1994년 7월8일)과 김정일(작년 12월17일) 같은 돌연사도 모든 신문이 예견한 듯 곧바로 오비추어리를 실었다.
기자들은 담당분야별로 주요 인사(특히 고령자)들의 오비추어리를 미리 작성해두고 그 신상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업그레이드 시킨다. 버락 오바마, 빌 게이츠, 타이거 우즈의 오비추어리도 틀림없이 준비돼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오비추어리를 작성한 뉴욕타임스의 유명 연예담당 기자는 그녀가 작년에 사망하기 6년 전에 본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엊그제 본보에 급한 부고가 하나 실렸다. 사회단체장을 역임한 유명인사의 부인으로 소개됐다. 망자보다 상처한 남편(혹은 자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관례)이므로 이상할 게 없었다. 내 마음이 언짢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약 열흘 전에 한 친지의 딸 결혼식장에서 그 명사 부부를 만났는데, 그때 부인이 매우 건강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 부인은 결혼식 다음 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후 회복되지 못했다. 친지 딸 결혼식이 열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장례식이 추수감사절 전날 거행됐다. 한 참석자는 결혼식을 전후해서 4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귀띔했다. 약 10년 전 크게 히트한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라는 영국 코미디 영화의 플롯과 정 반대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결혼식보다 장례식 소식을 더 많이 접하는 나이지만 마음이 놓이는 점도 있다. 사후에 오비추어리가 보도될 처지가 아니므로 아예 속이 편하다. 하지만 스스로 오비추어리를 쓰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떳떳하고 솔직하게 살아가야할 사람들이 있다. 사후 신문의 오비추어리 보도가 ‘보장된’ 사람들, 예를 들면 한국 대통령선거의 후보 같은 사람들이다.
<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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