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걸친 불경기로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대학을 갖 졸업한 졸업생은 물론 해고 당하는 근로자가 늘어 일자리 잡기는 그야말로‘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그러나‘지성이면 감천’이고‘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본인의 처한 상황에서 체면불구하고 이판사판 달려들면 취업을 못할 것도 없다. 요는 취업의지이다. 스펙을 보강하든, 아니면 본인의 적성과 능력을 알아주는 직장을 찾든, 학교를 다시 다니든, 물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보든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에 달렸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연방 센서스국에 따르면 대학을 나와서도 전공과 관련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2011년 기준 저소득 직장에 종사하는 가주의 30대 이하 대졸자 수가 무려 26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돼 대학 재학생이나 혹은 대학 졸업생들을 둔 한인 학부모들에게도 이젠 자녀의 취업이‘강 건너 불’이 아니게 됐다. 미국인들의 해고 및 취업기를 사례별로 익명으로 살펴보는 것도 본인의 전공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될 듯 싶다.
창업에의 도전
해고 후 스펙 보강… 일자리 오퍼 와
자원봉사 활용
보조교사 4년… 파트타임 교사 잡아
눈높이 낮춰서
이혼 후 학업… 중역 아내서 은행 텔러로
네트워킹 넓혀
전공 무관한 임시직까지 옵션 다양하게
■일에 대한 기업가적인 기술을 강화했다.
IT 분야의 세일즈 분야에서 지난 7월 해고됐다. 각종 베니핏은 2주 만에 없어졌다. 네 살배기와 이제 한 살도 안 된 두 자녀가 있다.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아내를 포함해 모든 가족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해고되면서 건강보험 혜택도 없어졌다.
해고된 후 링크드인, 만스터 같은 인맥, 구직 사이트를 활용해 각종 취업기회를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애썼다. 정작 나를 도와준 것은 해고를 통해서 기업가 정신을 갖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모빌 앱회사를 파트너와 공동으로 창업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스펙을 강화하고 이력서를 보내니 여러 곳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고 당장 오퍼가 왔다. 회사에서 해고되었을 때 일단은 낙망하지 않고 창업자적인 정신으로 도전한 것이 잠재능력에 눈뜰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석달 후 글로벌 소매체인에서 세일즈 엔지니어로 정식으로 일하게 됐고 현재 나의 역할은 모빌 앱을 개발하는 회사를 상대하는 것으로 세일즈만 할 때보다 기술을 쌓음으로써 훨씬 활동 영역이 광범위해졌다.
■학교로 돌아갔다
20여년이 넘는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동안 회사 중역의 아내로서 미 전국을 남편과 함께 이사를 다니면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따로 커리어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일단 학교로 돌아가서 인문학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지난 6월 졸업 후 7월과 8월 계속 구직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한 조그마한 로컬 은행에서 마침내 텔러로 일자리를 잡았다. 본인이 직장에 채용되기를 원하면 일단 몸으로 부딪히면서 아무 일자리든 잡을 수 있다. 물론 원했거나 혹은 당신이 받았던 봉급에 못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눈높이를 낮추면 아직 일자리는 많이 있다.
■자원봉사를 활용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무려 8년간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정작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실제로 취업을 하는 데 3년이 또 걸렸다. 이 기간 집을 차압당했지만 다행히 부모님이 재정적인 보조를 많이 해주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수입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커리어를 보강해나갔다.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대신 지역의 고등학교 연극반 학생들과 자원봉사를 많이 했다.
자원봉사 활동이야말로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역 고등학교와 연결고리가 형성되었고 이력서도 더 보강이 되었다. 한 달 전 사회를 가르치는 파트타임 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드디어 내가 좋아하던 학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파트타임 일자리이지만 4년간의 보조교사 끝에 얻은 영광스러운 교사 자리이다.
■기술과 맞는 일자리를 찾는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지난 경제위기로 남가주의 융자분야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2007년 부동산 경기가 휘청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8년간 모기지 론 오피서로 일했다. 이 분야의 일자리를 좋아했지만 주요 시장은 융자 재조정 고객이었다. 그리고 모든 회사들이 폐쇄됐을 때도 이 시장은 그런대로 버텼다. 그때부터 두 개의 일자리를 잡아 닥치는대로 일했다. 그 일자리들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진 못했다. 두 자녀를 둔 싱글맘으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만한 시간도 없었다. 오렌지카운티에도 일자리가 많았지만 대부분 저임금의 일자리였다.
이번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크레이그 리스트릍 통해 질로우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커리어를 비추어볼 때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지원하자마자 바로 연락이 왔다. 2주 후부터 세일즈 컨설턴트로 일하게 됐다. 꿈에도 원하던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됐고 이젠 경제적인 쪼들림에서 벗어나게 됐다.
■네트워킹 범위를 넓히면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유타 주립대학을 지난해 봄에 졸업하고 바로 일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과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깨닫게 됐다. 첫 번째 실수는 작문과 민속학 전공으로 미국학 석사학위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에게 그러한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두 번째 실수는 너무 꿈을 크게 키웠다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회사에 지원해서 웹사이트 작가 혹은 테스터로 지원했다. 물론 인터뷰는 한 번 해봤다. 생활비가 쪼들리면서 작가나 역사가가 필요한 자리를 계속 찾았다. 공군기지라든가 연방 국세청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도전했다. 패스트푸드점은 물론 월마트에도 이력서를 냈다. 그러나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친구의 방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떨 때는 기저귀 공장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열두 시간을 서서 일하기도 했다. 수개월 간의 구직 끝에 대학의 클래스를 조정하는 부서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자리를 간신히 잡았는데 월급이 400달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내핍생활이 굳어져 이 돈도 크다.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일자리를 원한다면 꿈은 크게 꾸지만 옵션은 다양하게 해놓아야 실망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유연성이 결국 진가를 발한다.
지난 가을 대학원에 진학해 문학과 작문을 공부하고 있으며 장래에 작문 교사로 일하기를 원한다. 지난 수년간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전개한 치열한 구직활동의 성과는 비록 미약하지만 삶의 폭이 넓어지고 감사한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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