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13시간의 긴 운전 길, 포드 트럭의 커다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경치를 바라보던 젊은 화가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번 봉사에 특별한 손님으로 동행한 그는 추상화가였던 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을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최고명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유학 와 캔사스 주립대 미술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LA에 정착했던 촉망받는 젊은 화가였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이제 막 새 생활을 시작하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그의 젊은 얼굴엔 이미 병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악성 임파선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올리브카운티 병원에서 힘겨운 투병을 시작했다. 학생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그는 환자를 넘어 너무나 아까운 ‘화가’로, 나를 안타깝게 했다.
투병생활 중에도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시들지 않았다. 더욱 치열하게 붓을 놓지않고 정진해가고 있었다. 건강으로 인한 미래의 불확실성이 예술의 확실성, 아니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하는 듯이 그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꾸준히 준비해온 작품들로 첫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된 무렵, 그의 골수는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퇴원은 이제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는 ‘버블 보이’처럼 격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다 바친 전시회의 리셉션에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부인의 요청으로 병원에선 미팅이 소집되었다. 내과에서, 암, 혈액, 세균학에 이르기까지 각과 전문의들이 한 자리에 모인 합동회의였다. 긴 회의 끝에 그들은 “이 젊은 예술가의 생과 삶의 가치, 보람이 바로 그의 작품이고, 전부이니 생명이 며칠 단축되더라도 리셉션에 참석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리셉션에 동반할 의사를 구해야 허가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결정을 전하는 부인의 얼굴에서 난 동반을 청하는 부탁을 읽을 수 있었다. 냉정한 의학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결정을 내려준 미국 전문의들에게 고마워하면서 내 쪽에서 동행을 제안했다.
리셉션이 끝날 즈음, 5살짜리 아들(이번에 의료봉사에 함께 갔던 젊은 화가)이 아빠의 뺨에 입을 맞추며 “아빠, 오늘은 집에 같이 가서 자는 거지? 나랑 밥도 먹자”고 졸랐다. 곁에서 지켜보는 내게도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아마도 가슴이 찢어졌을 젊은 아빠는 “병원으로 다시 격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밥을 먹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의사의 의무와 어긋난다 해도 그 간절한 눈빛을 안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짧은 삶을 작품들로 가족에게 남겨놓은 그는 며칠 후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의 그림 속에서 자란 아들이 잘 자라 아버지와 같은 예술의 길을 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전시회 리셉션에 동반해준 것을 거듭 감사하다고 마무리한 그의 부인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또 10년이 흐른 올해 그 부인에게서 다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화가가 된 아들의 첫 전시회 리셉션 초청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번 개인전이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어떤 형태로든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참석을 당부했다. 그 편지 역시 30년 전의 동반을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말로 맺고 있었다.
아들의 그림 속엔 바다와 낚시가 많았다. 15년 전 바다와 낚시가 좋아 멕시코 바닷가를 찾아갔다가 그곳 주민들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된 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에게 한 번 동행할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나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난 젊은 화가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아버지와 마지막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오래전 단 하루저녁 동반에 30년간 변함없이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들을 난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차오르던 그 감사의 마음이 봉사의 현장에서 본 주민들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도움으로 이어지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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